수능을 앞둔 내 동생에게

수능은 그 시험 자체보다는 준비과정에서의 인내와 결과에 대한 압박감을 견뎌내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어. 시험 자체는 그냥 그 긴 과정의 마지막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아. 수능을 못 보면 12년의 시간을 허송세월 한 것 같고 나태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도 운 좋게 성적이 '대박'이 나면 그걸로 다 된 것 같고. 나두 그런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살아보니 그게 정말 아니더라. 그러니까 그냥 마음 편히 보고 오면 돼.

2017-11-16     정소담

준형아. 얼마 전, 네 수능을 앞두고 우리 다들 모였었잖아. 외국인 친구들에게 내 동생 '브라더'가 이번에 수능을 봐서 같이 밥 먹으러 간다고 했더니 다들 그러더라. 너 형제 없잖아?

똥기저귀 갈아가며 돌보았다고 하면 오바, 업어 키웠다고 하면 그야말로 개오바가 되겠지만 한 집에서 살며 똥기저귀도 갈아줘 봤고 업어도 봤던 네가 어느새 커서 수능을 본다니. 그 날 식사자리에 모였던 왕형, 욱이형도 모두 비슷한 감정이었을 거야. 준빵이 수능을 본다니 우리가 안 늙을 수가 있겠어? 10년 전 다 같이 캠핑을 갔을 때 내가 볼일을 보고 밤중이 되어서야 혼자 캠핑장에 도착하자, 우리 누나 밥 줘야 한다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열 살의 네가 이제 곧 성인이 된다니.

"니가 수능을 잘 본다고 우리한테 무슨 슈퍼 정소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수능을 망친다고 우리한테 X밥 정소담이 되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게 어떤 꾸며낸 위로의 문장 같은 게 아님을 이번에 알았어. 정말로 그렇거든.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너의 수능 성적 같은 것에는 정말이지 큰 관심이 없어.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걸 우리는 알게 되었거든.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우리 모두 수능이 전부인 줄 알았던 시기를 다 지나왔고,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릴 위해 더 주옥같이 험난한 일들을 준비해두고 있는 탓에, 수능과 대학 입시 따위의 흥망은 어차피 이내 놀라우리만치 작은 문제가 되어버릴 거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러니 그날의 식사는, 사실 너의 '수능 대박 기원'이 아니라 그냥 그런 의식이었어. 수능을 잘 보아야 한다는 파이팅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진짜 어떤 대박을 염원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어. 그저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의식. 왕형이 누나한테 해줬던, 욱이형이 누나한테 해줬던, 몇 년 더 일찍 태어나 몇 가지를 먼저 경험해 본 사람이 몇 년 늦게 태어난 사람에게 해주는 그런 의식.

수능 시험이란 건 이 나라에서는 성인식과도 같은 의식이더라. 어떤 시대나 어떤 문화권에서는, 특히 원시의 사회에서는 들소를 잡아온다든가 맹수와 맞서 싸운다든가 혼자 동굴에서 하루를 보낸다든가 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가 된다고 하잖아. 대한민국에서는 수능이 얼추 그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수능을 못 보면 12년의 시간을 허송세월 한 것 같고 나태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도 운 좋게 성적이 '대박'이 나면 그걸로 다 된 것 같고. 나두 그런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살아보니 그게 정말 아니더라.

그래도, 맞은 문제를 두고도 "누나, 맞긴 했는데 사실 왜 맞았는지 모르겠어..." 하며 틀린 표시를 해두고 머리를 긁적이던 너의 정직함을 항상 기억할게. 해도 해도 어려운 문법 앞에서 졸린 눈을 부벼가며 몇 번이고 문제를 다시 풀던 너의 성실함을 기억할게. 누나가 쬐끔 더 살아보니까, 그런 정직함과 성실함을 가진 사람은 결국 잘못되지 않더라.

의연히 잘 다녀와, 준형아. 수능을 잘 보든 못 보든 넌 그냥 항상 우리의 사랑스러운 막둥이 준빵이야. 형들이랑 누나가 항상 여기에 있을게.

원래 수능이 치러졌어야 하는 날의 새벽에,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