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혁명을 일으켰지만 혁명은 딜레마를 낳았다

2017-11-06     강병진

▶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7년 11월7일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인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바라는 일반 대중의 염원이 낳은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70년 뒤 현실 사회주의는 붕괴했고, “세계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은 한때의 ‘해프닝’인 양 잊혀왔다. 100년 뒤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에서 21세기의 우리는 어떤 깨우침을 얻을 수 있을까.

러시아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이 성공한 뒤 한호하는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나는 (……) 한 노동자가 모는 화물차의 앞자리에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갔다. (……) 지평선에 걸쳐서 낮보다는 밤에 훨씬 더 멋진 수도의 번쩍이는 불빛이 메마른 벌판의 보석의 담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 차를 모는 늙은 노동자는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환희에 찬 몸짓으로 저 멀리서 빛나는 수도를 가리켰다. “내 것이야!” 그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이제는 모두 내 것이야! 나의 페트로그라드야!”

삶의 기틀과 사회의 얼개를 뜯어고치는 정치

혁명 러시아의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정치는 권력 교체를 둘러싼 정치 세력의 이합집산 따위가 아니라 삶의 기틀과 사회의 얼개를 확 뜯어고치는 활동과 투쟁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해방이었다. 온갖 특권과 부조리를 없애고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맺는 관계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대중이 이루고자 꿈꾸는 목표였다. 1917년에 러시아의 기층 민중을 일깨운 이 해방의 염원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유럽의 노동자, 더 나아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피억압민이 합류했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실은 1920년에 모스크바에서 지내던 미국의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먼이 벗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드러난다.

러시아혁명이 세계를 뒤흔들었다는 존 리드의 표현은 이처럼 빈말이 아니었다.

충격파의 진앙인 1917년으로 되돌아가자. 1917년 초엽에 전제정을 무너뜨린 공장 노동자들이 노동계급의 대표 조직인 소비에트를 만들었고 이 소비에트가 자유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와 정치 권력을 분점하면서 “이중 권력” 체제가 들어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권력”이 비단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전제군주 니콜라이 2세를 내쫓고 공장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은 작업 현장에서 폭군으로 군림해온 작업반장을 내몰고 민주적 선거로 새 작업반장을 뽑았다. 군대의 병사들도 고압적인 장교들을 처단하고 병사위원회를 만들어 장교단의 권위에 맞섰다. 러시아 제국의 강압적인 민족 정책에 신음하던 소수민족들도 자율성 확대와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왼쪽)과 이오시프 스탈린.

이렇듯이 혁명 상황에서 삶과 사회의 기틀과 얼개를 밑뿌리부터 재구성하려는 풀뿌리 대중의 염원은 자유주의 세력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에 머무르려는 멘셰비키 같은 온건 사회주의 세력이 협력해서 짜놓은 좁은 틀에 갇힐 리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펄펄 세차게 끓어오르는 밑바닥 기류를 가장 빨리 느끼고 잡아내서 강령으로 내세운 정치 집단이 바로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가 이끄는 볼셰비키당이었다. 노동자와 병사는 처음에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던 볼셰비키당을 자기들의 바람을 이뤄줄 정치 세력으로 여기고 집권을 노릴 강력한 정당의 위치로 밀어 올렸다. 볼셰비키의 성공은 거저 얻은 횡재가 아니라 풀뿌리 정서를 재빨리 알아채는 능력의 산물이었다. 이 놀라운 감각은 볼셰비키 안에서 경직된 위계제가 아니라 유연한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작동한 결과였다. 1917년의 볼셰비키당은 통념과 달리 음모 조직이 아니라 위아래 가리지 않고 활발한 토론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역동적 조직이었다.

반혁명의 파상 공세를 힘겹게 홀로 막아내

1917년과 1921년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사회의 상층 엘리트가 완전히 바뀌었다. 옛 귀족 엘리트는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특권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거나 외국으로 도주했다. 그 빈자리는 노동자와 농민으로 메워졌다. 혁명이 없었더라면 사회 하층에 머물렀을 이들은 계층 상승 기회를 거머쥐고 새 엘리트가 되었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일하던 세묜 카나치코프라는 노동자 볼셰비키당원은 혁명과 내전을 거치며 요직에 올라 1921년에는 어엿한 대학총장이 되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한 청소년은 1918년에 내전이 벌어지자 붉은 군대에 들어가 반혁명군과 싸웠고 스무 살에 연대장이 되었다. 바실리 추이코프라는 이름의 이 풋내기 연대장은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막아낸 소련의 명장이 된다.

하지만 1917년의 대중이 사회 위계구조의 타파를 바랐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엘리트의 교체가 혁명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볼셰비키와 풀뿌리 민중은 갈등을 빚었다. 세계 혁명의 전위를 자처했지만 내전과 경제 붕괴라는 혹독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맞부딪쳐 생존에 급급해진 볼셰비키는 권위주의적 조직관으로 뒷걸음쳤다. 그들이 보기에, 혁명이 생존하려면 모든 조직의 효율성이 높아야 했고 효율성을 높이려면 위계제가 있어야 했다. 달리 말해, 혁명 사회에도 사람 사이에는 위아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붉은 군대가 반혁명군을 물리칠 강한 군대가 되려면 장교의 권위를 세워야 했고, 공장의 생산성을 높여 경제 붕괴를 막으려면 경영진의 권위가 살아나야 했다. 군대에서는 가혹한 규율이 다시 부과됐고,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을 선출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새로운 형태의 특권과 불평등 부활

나는 스몰니(볼셰비키당 본부) 안에 별개의 식당이 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나서 느낀 놀라움을 기억한다. 한 식당에서는 소비에트와 제3인터내셔널의 요인에게 푸짐한 건강식이 주어졌고, 다른 한 식당은 평당원용이었다. 식당 셋이 있었던 적도 있다. 해군병사들이 이것을 알아버렸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와 그 세 식당 가운데 둘을 닫아버렸다. 그들은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나누도록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혁명에는 딜레마가 있다. 대중은 권위주의의 혁파를 바라며 혁명을 일으키지만, 지도자들은 혁명이 생존하려면 권위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혁명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되살아나는 권위주의에 실망한 대중은 혁명에 등을 돌린다. 러시아혁명은 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댔고, 그 궁극적 결과는 70년 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였다. 딜레마는 필연이라며 변혁을 포기할지, 아니면 역사에서 딜레마를 비켜갈 지혜를 얻어 더 올바른 변혁을 시도할지는 세계와 인간을 보는 각자의 철학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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