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이야기

미국 역사가 워런 와거는 <인류의 미래사>라는 책에서 지구의 미래를 그립니다. 서기 2,200년 지구축제일을 맞아, 116살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홀로필름을 통해 1995년부터 2,200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를 들려 줍니다. 지구 200년의 미래사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잿더미 위에 전지구적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며, 선거를 통한 '작은당'의 약진으로 사회주의는 해체되어, 결국 아나키즘적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역사의 끝은 물론 아닙니다. 미래의 지구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2015-06-03     오원식

해질 녘 몽골 사막 Ⓒ오원식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모어의 유토피아 섬에는 수도인 아마우로툼을 중앙에 두고 54개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들은 모두 걸어서 하루 안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이 섬에서는 8시간을 자고, 6시간을 일하며, 나머지는 자유시간입니다. 도시의 중심에는 시장이 있는데, 주민들은 시장의 창고에서 물건을 필요한 만큼 무료로 가져갑니다. 물론 그 창고에 물건을 채워 넣는 것도 섬의 주민들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므로 더 소유하려고 다투지 않습니다. 유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것에 돈을 낭비하거나 노동력을 허비하지도 않습니다. 황금은 변기로, 진주는 아이들의 장남감으로나 써야할 것들이죠. 잘 정비된 도시에는 집집마다 정원이 있고, 거리에는 회관이 있습니다. 도시마다 설치된 회관은 약 30세대, 400명의 구성원이 모이는 공동체의 장입니다. 사람들은 이 회관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공동으로 육아를 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의사결정은 민주적이며, 종교에 대한 완벽한 관용이 허용됩니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근현대의 공동체운동에 자극제가 됐습니다.

유토피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현실에서의 결핍을 상상 속에서의 해방과 위안으로 대신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현 가능할까라는 의문과 허황되다는 냉소도 가질 수 있죠. 유토피아적 상상이 현실변혁의 무기가 되고, 정신적 거울이 되곤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유토피아를 내세워 사기를 치기도 하고,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디스토피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유토피아를 좀 더 자세히 뜯어 보면, 역시 의식주가 인간사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답게 의식주를 해결하고, 고통 없이 장수하기를 바라는 욕망이 모든 유토피아적 상상에 투영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 정신적 자유, 자연 속의 목가적 삶도 의식주를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유토피아는 가장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 대한 심적 설계도인 것이죠.

미국 역사가 워런 와거는 <인류의 미래사>라는 책에서 지구의 미래를 그립니다. 서기 2,200년 지구축제일을 맞아, 116살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홀로필름을 통해 1995년부터 2,200년에 이르는 인류의 역사를 들려 줍니다. 편지, 칼럼, 공문서, 일기 등의 미래의 사료(史料)를 가지고 말이죠. 지구 200년의 미래사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3차 대전이 일어나고, 그 잿더미 위에 전지구적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며, 선거를 통한 '작은당'의 약진으로 사회주의는 해체되어, 결국 아나키즘적 세계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계가 역사의 끝은 물론 아닙니다. 미래의 지구로 좀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사회주의가 지배하는 평등의 시대. 전후 파국을 맞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세계당이 출현합니다. 이들은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고 완전한 세계화를 위해 투쟁하죠. 그리고 2056년 세계무역컨소시엄은 해산되고, 새롭게 세계연방이 구축되어 호주 멜버른을 수도로 정합니다. 세계연방의 목표는 3대 악(惡)인 종족주의,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근절입니다. 연방은 세계를 1,000개의 성으로 나누고, 각성에서 2명씩 총 2,000명으로 인민의회를 구성합니다. 인민의회에서 행정요원 50명을 선발하면, 이 행정요원의 대표가 연방의 대통령이 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람도 급여를 받았고, 가장 잘 사는 성은 가장 못 사는 성의 소득을 두 배 이상 초과할 수 없었으며, 각 개인별로도 소득격차가 두 배를 넘지 못하게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연방도 유토피아는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당의 독재에 염증을 냈고, 개인의 창의와 자유에 목말라했습니다. 가족도 해체돼 뿔뿔이 흩어졌죠. 이 시기에 유전자 조작으로 가장 똑똑한 인간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미래사를 모두 듣고 난 후 손녀는 말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공동체주의를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세계 질서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가 세계 질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질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말이죠. 유토피아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죠. 날마다의 우리 일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심적 설계도가 유토피아입니다. 지금 여기의 소박하고 때로 초라하기까지 한 일상적 순간은 사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음으로 넘길 수 있는 삶도 없습니다. 매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쉬는 명상, 자연과의 교감, 순수한 몰입의 예술, 이런 것들이 제로베이스로의 회귀를 도우는 효모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서부터 좋은 삶, 좋은 세상이 발효되지 않을까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노자 도덕경에는 수레바퀴의 비유가 있습니다. 수레바퀴는 그 중심이 비어 있어야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수레바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중심이 빈 수레바퀴처럼, 우리 욕망이 굴려놓은 세상의 속도를 늦추고, 빈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일상을 살아갈 지혜과 감성과 용기가 생기기라 믿습니다. 자연에 더 가깝고, 밥은 달며, 옷은 아름답고, 거처는 편안하며, 풍속은 즐거운, 우리 모두가 아버지이고 자식인 세상.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no where)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그 곳은 지금 여기(now here)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