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모른다

내가 동양인, 황인종, 한국인, 여성, 20대, 비영어권 인간이라는 것은 이 소통의 공간에서 중요하지 않다. 코즈모폴리턴, 절대적 환대와 세계시민의 가능성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2017-10-10     홍승희

"봐봐" 하고선 흰 종이에 아무렇게나 물감을 칠했다. 종이의 흰 공간과 물감 색이 선과 면이 되어 무질서하게 널브러졌다. "잘 보면 이 안에 소녀가 보일 거야" 하면서 낯선 색깔, 패턴 사이에 보이는 소녀를 따라 그렸다. 뒷모습 소녀, 비를 맞고 있는 소녀가 나타났다. "보이는 대로. 종이를 바라보면 소녀가 보여. 마음에 있는 게 보이는 거야. 그걸 따라 그리면 돼. 스와리카도 그릴 수 있어." 붓을 주었다.

그녀와 헤어질 때 한국어로 편지를 써줬다. 편지를 받은 스와리카는 뜻을 무척 궁금해했다. "비밀이야. 언젠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무슨 뜻인지 물어봐." 외국인 친구들과 헤어질 때 종종 한국어로 편지를 써준다. 편지를 빌미로 상상과 설렘을 선물하는 거다. 내 짧은 영어로 미처 담지 못한 마음을 쓰기도 하고, 방명록처럼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쓰거나 영원히 읽히지 않는 일기를 쓰듯 구구절절 속내를 쓴다. 그들에게 내 글자는 그림으로 보일 것이다. 마주치는 모든 곳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언어가 있다. 느껴지는 마음을 겨우 몇가지 그림과 언어로 주고받는 소통이다.

나는 아직도 삶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몰라서 걸어다닌다. 편지 마지막에 꼭 쓰는 말이다. '당신은 이 글을 읽지 못해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으니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