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트의 결단'은 가짜 뉴스다

전술핵을 도입해야 한다는 보수 언론은 헬무트 슈미트의 결단을 추켜세운다. 소련의 SS-20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의 퍼싱-2를 도입한 독일 총리의 고독한 결단 어쩌고 하면서 말이다. '슈미트의 결단'에서 강조하는 핵심 논리는 퍼싱-2를 갖다 놓았기 때문에 소련이 상호감축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아니다. 이중결정을 했던 1979년은 브레즈네프 시기고, 퍼싱-2를 배치하던 1983년은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지도자였다. 전략무기 감축, 특히 유럽에서의 중거리 핵미사일 감축을 추진했던 인물은 바로 고르바초프다. 그가 등장한 시기는 1985년이다.

2017-09-18     김연철
ⓒBoris Spremo via Getty Images

1. '이중결정'이란 말을 왜 안 하나?

핵심 내용은 "소련과 핵 군비통제 협상을 우선적으로 추진한다. 1983년까지 성과가 없으면 NATO는 SS-20에 대응하는 무기를 배치한다"는 것이다. 핵군비 통제 협상을 먼저 제안했고, 그것이 안 되면 전술핵을 배치하겠다는 약속이다. 핵무기를 배치하니, 위협을 느낀 소련이 협상에 응한 것이 아니다.

2. 핵억지로 핵군축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유럽의 중거리 핵 미사일 폐기는 '슈미트의 결단'으로 상징되는 억지력의 강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냉전의 전사 레이건이 밀어붙여서, 압력을 느낀 소련이 굴복한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깃발을 들고 혜성처럼 등장한 고르바초프의 평화공세를 배제하고, 어떻게 전략무기 감축협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 1985년 제네바에서 이루어진 미소 정상회담과 그리고 아무런 합의가 없었지만 결국 냉전종식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1986년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서 누가 핵군축을 주도했는지를 좀 알았으면 한다.

3. 어떻게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유럽의 중거리 핵 미사일을 폐기하기로 합의했을까?

1979년의 이중결정에서 (1986년의 레이캬비크를 거쳐) 1987년의 워싱턴 미소 정상회담에서의 중거리 핵 미사일 폐기까지는 중간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별 관계가 없다. '슈미트의 결단'을 강조하는 사람들처럼 직접적인 인과 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4. 유럽의 경험을 도대체 어떻게 한반도에 적용할 수 있을까?

슈미트는 소련의 SS-20이 배치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퍼싱-2 배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서독은 아무런 억지 수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다르다. 남북한은 이미 공포의 균형 상태다.

'슈미트의 결단' 사태는 한국 보수언론의 수준을 드러내고, 매우 우려할 만한 반지성 풍토를 상징한다.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