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

사용자들은 서로 교류하며 끊임없이 데이터를 제공한다. 누가 누구의 친구인지, 누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 결과, 페이스북은 한 분기에 10조원가량의 매출을 벌어들인다. 매출의 대부분이 광고에서 나온다. 사용자 데이터가 있기에 가능한 광고다. 결국 페이스북 매출의 상당 부분은 데이터에서 뽑아낸 것이다. 사용자가 쓴 글, 맺은 친구관계, 형성한 그룹, 좋아한 페이지가 이익의 원천이다. 어차피 불특정 다수의 기여를 통해 얻은 이익이니 불특정 다수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게 맞다는 이야기다.

2017-09-15     이원재
ⓒNurPhoto via Getty Images

글을 쓴 계기가 된 것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의 말이었다. 저커버그는 2017년 5월 미국 하버드대학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여기서 평등을 이루기 위해 우리 세대 나름의 '새로운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커버그의 '기본소득' 제안을 엎어치다

〈파이낸셜타임스〉가 주목한 것은 그중 한 대목이었다. 저커버그는 "새로운 일을 하려는 사람에게 완충장치를 주기 위해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아이디어를 탐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소득을 주는 제도인 보편적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지금껏 여러 차례 세계적 화제가 되었던 아이디어다. 기술 변화로 일자리는 줄어들고, 인간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함으로써 임금을 받는 사회체제는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로운 인간의 역할에 맞는 새로운 소득 분배 방식이 필요해진다. 보편적 기본소득은 그 논리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첫째 질문에 대한 대략의 정답은 '기술 변화에 맞는 새로운 인간의 역할 찾기'로 수렴된다. 기본소득은 비자발적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노동,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보람과 즐거움을 위한 일을 찾아가도록 하는 소득분배 체계라는 설명이다.

손힐은 그 재원으로 '데이터'를 제안했다. 그 데이터로부터 수입을 얻는 페이스북이야말로 재원을 제공해야 할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정보·지식이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요소

매출의 대부분이 광고에서 나온다. 사용자 데이터가 있기에 가능한 광고다. 결국 페이스북 매출의 상당 부분은 데이터에서 뽑아낸 것이다.

비슷한 종류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곳이 있다. 미국 알래스카주다. 알래스카주는 그곳에서 나는 석유를 기반으로 '알래스카 영구 기금'을 조성하고, 이 기금의 수익을 1년 내내 거주한 주민들에게 나눠준다. 1982년부터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연간 800~2천달러를 매년 지급하고 있다.

데이터가 21세기 원유와 같은 것이라면, 거기서 나온 수입은 미 알래스카주가 시행하듯 골고루 나눠주는 일이 옳다는 게 손힐의 시각이다.

여기에 '지식'이라는 새로운 생산요소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 20세기 말쯤부터다. 앨빈 토플러는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어 '정보화 혁명'의 물결이 온다고 했다. 지식과 정보가 자본주의의 기반이 된다는 예측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지식노동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지식이 노동의 핵심이며 생산의 주요 기반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모두 20세기 말, 지식자본주의 초기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학자들이다.

여기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 인터넷과 인공지능이다. 정보와 지식은 본격적으로 사람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대량의 정보를 저장해줄 뿐 아니라, 검색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스스로 분석하며 진화할 수 있게 됐다. 사람과 분리돼 사람을 뛰어넘는 지식의 등장은 그렇게 가능해졌다.

석유 불평등에서 교훈 얻어야

데이터는 어떻게 생산되는가? 페이스북, 구글, 카카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산한다. 서로 연결하고, 서비스를 사용하고, 놀면서 생산한다.

사실 석유는 근대사회 부의 원천이면서 세계의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석유라는 에너지원이 없었다면 20세기 인류의 놀라운 경제성장은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석유가 없었다면 훨씬 더 비싸게 사용했을 것이다. 석유는 연료가 되고 전기가 되고 플라스틱이 되어 우리 일상을 완전히 휘감았다.

데이터는 어떨까? 장담할 수 없다. 이미 미국과 중국의 몇몇 기업이 소셜미디어와 검색엔진의 데이터를 과점해가고 있다. 그곳에서 나오는 가치는 현실이 돼가고 있지만, 그 가치를 분배하는 시스템은 석유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가치는 누구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답을 못하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은 많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20세기의 윤리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놀이도 일이고 소비도 일이라는 인식이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 영리활동과 비영리활동, 계약을 맺고 하는 노동과 자발적으로 하는 노동의 경계선은 희미해진다. 일과 삶의 균형 대신, 일과 삶의 일치를 지향할지도 모른다. 재산 소유권보다 시간 통제권이 더 중요한 인권으로 보호받아야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회계약 고민할 때

그 뒤 주식회사와 노동권 같은 자본주의 생산체제의 핵심 요소가 자리잡고 사회가 안정되기까지는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렸다. 그 전까지는 모두에게 혼란과 고통인 나날이 이어졌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