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 벗어던진 루나에 열광하는 이유

2015-05-31     곽상아 기자
ⓒMBC

#2.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허걱, 잘한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가면으로 얼굴 가린 사람을 궁금해한다. ‘황금락카 두통썼네’가 누구지? 가면을 벗었는데, 놀라워라, f(x)의 루나. 아이돌 그룹 멤버가 빼어난 가창을 보이고 자신들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진다. 단지 가면을 쓰고 노래했을 뿐인데….

평범한 사물 속 생소한 모양

<복면검사><복면달호><반칙왕><각시탈><오페라의 유령> 등등. 최근 방송을 시작한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부터 드라마, 영화, 뮤지컬은 물론 권력자를 비판하는 정치적 풍자에 이르기까지 가면이 라면처럼 흔하다. 가면은 숨기는 것이되, 숨기려는 사람에게는 거꾸로 자신을 드러내는 길을 열어준다. 닫아야 열리는 문. 가수 루나는 가면을 쓰니 더 편안하게 노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감춰야 드러난다는 이 역설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장마철 논둑처럼 정보가 철철 넘치는 시대에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 정보를 제한하는 것에 사람들은 왜 열광하는가. 정체를 가리는 가면의 정체는 무엇인가.

생소한 바람이 부는 시도 있다. ‘겨울 꽃밭의 대화’. “버려진 겨울 꽃밭 한쪽 귀퉁이./ 마른 풀잎 하나가 말한다./ 방금 지나간 것이 무엇이지?/ 다른 풀잎 하나가 말한다/ 글쎄/ 무엇을 위한 지나감일까?/ 글쎄/ 또 지나가는데!/ 그렇군, 끝이 없잖아/ 대체 저것들이 무엇일까?/ 아마 바람이라는 걸 거야/ 왜 자꾸만 지나가는 거지?/ 글쎄.”(홍영철)

시를 읽고 나면 낯선 바람이 마음에 분다. 문학 언어를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러시아 형식주의)이라고 정의한 이유다. 가면 벗은 루나는 가면 쓰기 전의 그가 더는 아니다. 새로워진다. “오늘날 어떤 대상을 존재케 하는 최상의 전략은, … 그 대상을 사라지게 하고 감추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장 보드리야르)

5월17일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회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택 근처에서 자원외교 비리 수사 등을 촉구하고 있다.

‘모름지기-물론-당연’의 삼각벨트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면 자유로울 것 같았다. 홀가분하다. 진짜 후회 없이 노래를 불렀다.” 가면을 벗은 루나가 한 말은 그가 가면을 쓰기 전에, 이미 ‘보이지 않는 가면’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이돌, 춤, 몸매 따위 말들이 가요계에서 유통되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실상 루나는 줄곧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인들에 의해 가면이 씌어졌던 것이다.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사용된 가면에서 비롯한 말이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돼 분석심리학에 이르면, 가면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진자처럼 요동치는 사회에 사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핵심 도구가 된다. “엄밀히 말해서 페르소나는 참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에 대하여 서로 타협하여 얻은 결과다.”(카를 구스타프 융) 가면 쓰기 전 루나는 페르소나에 갇힌 박선영(본명)이며, 가면 쓴 루나는 한순간일지언정 박선영이 되었던 것이다.

루나-가면-노래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시선은 호기심인가, 놀라움인가. 방송사 제작진이 밝힌 의도는 이렇다. “숨겨야 사는 복면가수와 이를 밝혀내려는 연예인 판정단 사이의 긴장감과 반전의 재미를 강화했다. 경쟁이 아닌 다양한 목소리를 편견 없이 들어보면서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상상해보는 재미가 <복면가왕>의 기획 의도다. 시청자들도 함께 추측하며 방송을 즐겼으면 좋겠다.”(4월3일) 제작진의 의도는 대부분 이뤄진 듯 보인다. 10%를 오르내리는 꾸준한 시청률에다 지난 5월10일 방송분은 같은 시간대 경쟁 프로그램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시청률이 오르기도 했다.

사람을 끄는 ‘관심의 경제학’

두부를 생각해보라. 두부의 속을 보기 위해 자르면, 애초 속이었던 부분은 다시 두부의 겉이 된다. 또 잘라도 속은 없고 겉만 있다. 어떻게 잘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늘 두부의 겉면이고 속 그 자체는 결코 볼 수 없다.”(이강영 경상대 교수) 예능이라는 가면에 덧씌워진 가면은 본질이 사라지고 변질된다.

2000년 개봉한 영화 의 한 장면

불편한 것은 가면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가면 뒤 사람을 맞히라!’는 틀이 사람들을 윽박지른다. 가면 뒤 루나를 맞히지 못하면 온전한 소비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삼삼오오 모이면 가면 뒤 사람을 추리하기 바쁘다. “소비인간은 그 어떠한 향유이든, 무언가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즐기는 것, 자신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하거나 만족시키게 하는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개발하는 것이 강요된다.”(장 보드리야르)

가면은 사람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자석으로도 변질된다. 관심 그 자체가 이윤 창출에 직결되는 ‘관심의 경제학’ 시대다.(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 텔레비전·신문·잡지 같은 전통 매체와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가 한데 뒤섞여 “모두 인간의 관심 혹은 주의력을 두고 벌이는 일종의 제로섬게임”을 벌이고 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의 미방송 장면

사회적 자외선을 막는 마음의 선글라스

가면은 애면글면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다. 그것은 삶을 돌파하는 ‘액션가면’이자 삶을 즐기고픈 ‘예능가면’이며 삶을 희망하는 ‘주술가면’이다. “현실 생활로부터의 해방, 예컨대 이 해방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이 해방감이야말로 민중에게 부여하는 가장 기본적인 위안”이다(김욱동). 가면을 벗고 울음을 터뜨린 루나에게 다수가 공감하는 이유다.

기사에 참고한 책들

(유종호, 민음사, 1999)

(김용석, 한겨레출판, 2010)

(김현, 문학과지성사, 1992)

(이부영, 일조각, 1998)

(이부영, 한길사, 2001)

(이부영, 한길사, 2002)

(김상환·박영선·장태순 엮음, 이학사, 2015)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2002)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동문선, 2002)

(나카야마 겐 지음, 박양순 옮김, 북바이북, 2009)

(마셜 맥루언 지음, 김성기·이한우 옮김, 민음사, 2002)

(김호기·임경순·최혜실 52인 공동집필, 한길사, 2002)

(김욱동, 현암사, 1994)

(이기상, 까치,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