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의 장르적 로컬라이징과 우원재

창모가 '난 비닐하우스 출신 허슬러 돈 훔쳐'라고 하면 "니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오케이션이 "돈 못 벌면 뒈지기로"라고 하면 "어쩌라고?" 싶고, 스윙스가 '게으른 래퍼'들 욕하며 잘 먹고 잘 산다고 뻐기면 "너 잘 났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우원재와 로꼬가 '사호선 첫차를 타고 집에 간다'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티브이 속 랩스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많은 래퍼들은 이미 돈더미에 오른 '과거완료형'의 가사로 허슬을 과시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나"있다. 하지만 우원재는 세상의 비웃음을 올려다보는 '현재 진행형'의 가사로 자신의 왜소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에 불복한다.

2017-09-14     윤광은

한국 MC들은 스웨거는 부리고 싶은데 근거가 될 배경 서사가 없으니 눈알만 부릅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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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건 조크다. 힙합은 주류 음악이 됐고 힙합을 즐겨 듣는 대중은 많다. 하지만 이건 신랄한 조크다. 아닌 게 아니라, 힙합을 흥미로워하는 대중만큼이나 힙합을 거북해하는 대중이 많다. 한국 래퍼들은 밑도 끝도 없이 센 척이나 하는 허세꾼이란 것이다. 까놓고 말해 '힙찔이'다. 이 땅에 힙합이 정착한 지 이십 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왜 이토록 힙합에 면역되지 못하고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까.

따라서 다른 국가 공동체, 지역 공동체에서 힙합이란 장르 음악을 창작하는 이들은 장르의 사운드적 재현과 서사적 재현이 일치하는가라는 곤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알다시피 한국은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은 국가 중 하나다. 이곳에는 마약도 총기도 없고 빈민가도 없다. 한국 래퍼들은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며 급식을 먹고 정규 교육을 이수한 샌님들이다. 그들이 힙합과 더불어 자란 고향은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니라 힙합 플레야 국힙게와 자녹게, 인터넷이다. 게토의 음악을 만들지만 게토라는 공간이 없는 나라에서, 하드코어한 가사가 수입되는 와중 가사의 기의는 거세당하고 기표만 살아남아 음악적 스타일과 클리셰로 쓰인다. 아무리 센 척을 해봐야 맥락이 없는 "아무도 뭐라 안 하는데 혼자서 화난" 상태가 되는 것이다. 하여튼 '화를 내기' 위해 허수아비를 향해 종주먹질하고, 별 두서도 없는 과시형 가사를 쓰고, 심지어 싸이월드 다이어리 험담이 비프로 비화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본토 힙합의 제왕 제이지가 "코카인을 팔아보니 CD를 파는 법도 알겠더군. 난 사업가가 아냐 사업 그 자체지("I sold kilos of coke, I'm guessin' I can sell CD's. I'm not a businessman; I'm a business, man!")라고 뱉으면 범접할 수 없는 '스웨거'가 흘러넘치지만, 한국 MC들은 스웨거는 부리고 싶은데 근거가 될 배경 서사가 없으니 눈알만 부릅뜬다.

이곳엔 게토가 없으니까 게토의 음악 같은 건 집어치우자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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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라이징은 하나의 제약 사항이다. 창작에 따른 제약은 창작의 전망과 행동반경을 좁히는 장애물이지만, 창작자에게 미션을 제시하며 영감과 도전의식을 북돋기도 한다. 형형색색으로 엉클어진 큐브를 맞추듯 좁은 조건을 뚫어내며 창작은 고차원의 작업으로 승화되고, 그 미션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클리어 해 보이는 묘미도 있다. 이건 랩 가사를 쓰는 데 라임이란 제약이 붙는 것과 그 뿌리에서 다를 것이 없다. 서로 다른 지역적 조건을 간파하여 장르적 변용을 이루거나 그 조건을 뛰어넘으며 매력과 설득력을 갖춘 음악을 만드는 것이 한국 힙합의 미션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집념에도 불구하고 일리네어조차 본토의 관습을 백 퍼센트 재현하진 않았다(혹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리네어식 돈자랑 가사는 겸손을 강요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의 드러냄을 배격하는 한국에서 사회적 거부감을 피하기 힘들다. 데프콘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도끼의 졸부 근성을 디스한 건 그런 잠재적 여론이 개별 음악가의 창작을 통해 불거진 사건이다. 도끼가 이런 무형의 압박에 대답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의외로 바른생활 이미지다. 나는 남에게 피해도 안 주고 흥청망청 대지도 않으며 성실하게 산다고 웅변하는 것이다("난 술 담배 안 해. 쌍스러운 욕도 입으로 안 뱉어. 난 싸우지도 않아. (...) 열심히 일하며 살 뿐 낭비 않네.", '111%' 중에서) 본토의 래퍼들은 서슴없이 낭비를 자랑하고, 마약과 범법, 향락을 가사에 절여낸다. 하지만 도끼는 "마약 조사와도 검찰들은 날 못 잡네. 생긴 거완 다르게 바르게 살아왔네."라고 자신이 사회 질서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점에서 일리네어의 돈벌이 캐릭터는 게토의 허슬러보다 근면한 젊은 사업가에 가깝다.

이 대목은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관습과도 직결된다. 힙합의 저항정신이란 곧 미국 흑인들이 처한 인종적 소수자의 자의식이며, 억압적 백인 사회를 향한 분노다. 한국 래퍼들은 계층적 자의식이 없는 보편적 정체성의 자리에서 저항정신을 전용했다. 한국 힙합의 사회 비판은 본토와 다른 방식으로 변용됐다. 민주화 항쟁과 노동 운동에서 비롯한 저항적 민중문화의 코드와 결합하고(MC 스나이퍼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사로 지식인 이미지를 치장하고(타블로 'Lesson' 시리즈) 비민주적 정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에 합류한 것이다(이명박근혜를 비판한 트랙들, 제리케이의 '우민 정책'과 '하야해').

로컬 신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가사는 메아리 잃은 외침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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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파워가 방사능으로 활동하던 2010년에 발표한 앨범 '리듬파워'는 래퍼의 출신지를 본격적으로 외친 선구자격이다. 앨범에 수록된 '인천 상륙작전'은 월미도 바이킹과 오이도 같은 구체적 기호를 통해 지역색을 어필하는 데 성공한 편이다. 하지만 멤버 보이비는 힙합 LE, 힙합 플레이야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래퍼들이 출신지를 외치는 걸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사실 인천에 그렇게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컬 신의 부재는 그 후 데뷔한 '힙합 LE 세대'에게서 적나라하다. 씨잼이 제주도에서 왔다고 말할 때, 제주도가 힙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제주도에서 음악을 한 적도 없고, 자신이 만드는 음악에 아무런 지역색이 들어 있지도 않다. 심지어 창모는 자신의 동네 경기도 덕소리의 주변부적 성격을 강조하며 서울에서 귀하게 자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니 삶이 무슨 할렘이노?"라고 비난한다. 그렇게 치면 덕소리는 무슨 할렘인가? 그냥 수도권 변두리 중 하나지. 창모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받을 만큼 곱게 자란 몸 아닌가? 한반도에서 물리적 악조건을 할렘에 비견할 수 있는 곳은 함경북도 아오지 탄광밖에 없다. 다들 학교랑 학원을 오가다 홈레코딩 마이크 구입하며 랩 시작한 거 뻔히 아는데 저런 말을 하다니.

최근 나타나는 '출신지 Represent'가 주는 교훈은 이렇다. 어떤 장르적 요소를 재현할 때 자신이 음악을 하는 '장소'의 조건을 고려하여 음악적 내용과 맞물리도록 설계하지 않으면 재현을 위한 재현, 알맹이 없는 클리셰에 머문다. 더 나쁘게는 '본토 힙합'의 스웨거를 흉내 내보는 자기만족에 빠진다. 알다시피 이런 음악은 감흥이 아니라 실소를 준다. 다만 한국 힙합이 급격히 상업화·미국화하는 절정에 이른 지금 상황은 흥미롭고 말할 거리가 넘친다. 창작자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 수행하는 창작의 패턴과 자신이 처한 창작의 조건을 일깨워 주고, 짜임새 있는 음악을 만들도록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장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우원재는 항상 악과 분노에 받혀있지만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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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에는 스트릿 크레드(street credibility)라는 관습이 있다. 직역하면 거리에서의 명성이다. 범죄와 마약, 가난의 소굴 게토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누가 더 위험하고 준법을 거역하는 삶을 살았는지 채점하며 남근의 크기를 겨루는 척도다. 말했듯이 게토 같은 빈민가-범법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스트릿 크레드라는 개념도 성립할 수 없다. 거론할 수 있는 전과 이력이 없다 보니 스윙스처럼 '센 캐릭터'의 진정성을 증명하려고 학창 시절 일진이었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진다. 혹은 마약 전과를 가진 미국 래퍼는 스트릿 크레드를 가산받지만, 이센스는 울면서 참회의 기자회견을 했다. '모솔'에 '아싸'를 자처하며 남근의 강력함이 아니라 남근의 비루함을 고백하는 블랙넛은 이런 로컬라이징의 난관을 손쉽게 우회한다. 사우스 브롱크스가 아닌 인터넷 동호회가 장르적 발상지이며, 믹스테이프 배포와 MC들의 교류가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지역적 실정 또한, 자녹게 출신에 인터넷 하위문화를 재현하는 블랙넛의 캐릭터와 맞아떨어진다.

블랙넛이 '랩 하는 일베충'이라면, 우원재는 정신과에 다니고 비니를 눌러 쓴 채 음울하게 삼백안을 뜨는 '힙합 오타쿠'다. 둘 모두 미국 힙합에 없는 한국화된 캐릭터다. 그리고 보다 현명한 방식으로 로컬라이징을 수행하는 건 우원재다. 그가 '시차'에서 미국 힙합의 관습 '허슬'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라. 우원재가 작사에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래퍼들과 어떻게 다른지, 대중이 왜 우원재의 가사에 새롭다며 호감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허슬'의 용례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며 돈벌이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힙합이란 음악이 할렘가를 벗어나는 동아줄이며, 개인의 수완 외에 가난을 극복할 방도가 없는 미국 흑인들의 현실이 낳은 관습이다. 때문에 허슬은 마약 판매 같은 불법적 행위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 지향적 경향이 심화된 쇼미더머니 시대에 허슬은 스웨거만큼 자주 들먹여지는 클리셰로 수입됐다. 하지만 게토가 없는 한국에서 허슬은 음악적 다작을 칭하는 의미로 한정됐고 지역적 현실과 융합되지 않고 있다. "돈 벌어 돈 벌어" "나 죽고 나서 쉴게" "커져가는 돈벌이 돈 돈 돈벌이 워!"처럼 서사적 설득력이 아닌 동어반복의 상투성을 전시한다. "한국 힙합은 다 똑같다, 허세다"라는 대중의 피로감은 이해가 간다.

창모가 '난 비닐하우스 출신 허슬러 돈 훔쳐'라고 하면 "니가?"란 말이 튀어나오고, 오케이션이 "돈 못 벌면 뒈지기로"라고 하면 "어쩌라고?" 싶고, 스윙스가 '게으른 래퍼'들 욕하며 잘 먹고 잘 산다고 뻐기면 "너 잘 났다"는 생각만 든다. 하지만 우원재와 로꼬가 '사호선 첫차를 타고 집에 간다'라고 말할 때, 듣는 이들은 티브이 속 랩스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이렇듯 창작자의 개별성과 듣는 이의 개별성이 접속되며 보편성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래퍼가 직접 가사를 쓰는 작사 양식을 지닌 힙합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 많은 래퍼들은 이미 돈더미에 오른 '과거완료형'의 가사로 허슬을 과시하고 이유도 없이 "혼자 화나"있다. 하지만 우원재는 세상의 비웃음을 올려다보는 '현재 진행형'의 가사로 자신의 왜소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그에 불복한다. 그는 게토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자살률과 감정노동의 나라에서 정신적 폭력에 쫓기며 '알약'을 복용한다. 이런 진솔한 스탠스가 서정적 표현력과 어울려 "모두 비웃었던 동방의 소음이 어느새 전국을 울려대"라는 단 한 줄의 자기과시에 울림을 불어넣는 것이다.

블랙넛이 열등감에 찬 캐릭터를 방패 삼아 나 보다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우원재는 항상 악과 분노에 받혀있지만 누구도 모욕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지배적 질서라는 나 보다 거대한 대상을 노려보고 삿대질하며 듣는 이에게 통렬함을 준다. '시차'는 근래 상업 차트에 오른 힙합 트랙 가운데 가장 영리하고 독창적이며 떳떳한 가사적 성취를 이뤘다. 한국 래퍼들은 이 신참 래퍼에게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야 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