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이 연 '거래의 혁명'

복식부기가 회계를 상인들의 두뇌에서 해방시켜 세상에 내놓았다면, 블록체인은 회계를 조직의 금고에서 꺼내 세상에 내놓는 셈이다. 복식부기를 발명한 루카 파치올리가 그 결과를 몰랐던 것처럼, 비트코인을 만들면서 블록체인 기술을 처음 선보였다는 '나카모토 사토시' 역시 그 결과를 모두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중개인 없는 세상은 이제 가능하다. 이런 세상은 절차와 증빙과 관료 시스템에 지친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블록체인에 대해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질문은 여기 있을지 모르겠다. 중개인 없는, 모두가 독립적인, 100% 투명한 세계는 바람직한가?

2017-08-21     이원재

영국 소더비 경매의 모습.

가 천경자 화백의 작품인지 아닌지는 26년째 논란 중이다. 1980년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가 위작 논란에 휩싸였다.

그림에 꼬리표를 붙이고 암호화하고 소유권이 바뀔 때마다 기록해두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디지털 예술작품이라면 이미 가능하다.

모두가 모든 기록을 알 수 있다

비밀은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을 소유·거래하는 방식에 있다. 일반 화폐처럼 은행을 경유하는 대신, 가상화폐는 소유와 거래 기록을 암호화해 인터넷상의 특정한 장소에 보관해둔다. 그리고 누구든 키가 있으면 열어볼 수 있게 한다. 결국 모두가 모든 기록을 알 수 있다. 은행이 아니라 기록 자체가 소유권과 거래이력을 증명한다.

화폐에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다. 땅에도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다. 국가라는 제3자, 은행이라는 제3자가 땅과 돈의 소유권을 지정해준다. 국가는 토지대장에 땅 소유권을 명시해놓는다. 은행은 계좌마다 이름과 액수를 써서 봉인해둔다. 사람들은 국가와 은행의 기록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땅이나 돈을 가질 수 있다. 아니,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확인시킬 수 있다.

정부가 모든 그림의 소유권과 거래기록을 관리하는 그림등기소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우산을 등록하고 거래가 있을 때마다 우산 소유권 이전 기록을 전문자격증이 있는 우산 거래사를 통해 검증받도록 관리하는 우산공단을 설립할 수도 있다. 볼펜이 생산될 때마다 일단 맡겨두고 필요한 사람에게 담보를 잡고 빌려주는 볼펜은행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그림과 우산과 볼펜의 거래는 투명해지고, 가짜 그림 시비와 잃어버린 우산 수와 볼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현저히 줄어든다.

투명한 어항 속에서 주고받는 거래

인터넷 쇼핑몰 아마존의 창고.

블록체인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비트코인 거래는 신용카드 거래나 은행 계좌 이체와 달리 제3자의 확인이 필요 없다. 거래 당사자들끼리 거래하면서도 투명하게 소유권 이전 내용과 거래 조건이 기록된다. 소유권과 거래 기록은 공개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중개기관이 확인하는 대신, 다수 대중이 확인하도록 시스템을 뒤집은 것이다. 주고받는 과정만 보면 어쩌면 현금 거래와 같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투명한 어항 속에서 주고받는 거래다. 중개인이 사라지면서 예술작품 거래에도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된다.

블록체인 이용 거래가 일으키는 변화는 미술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회계학 용어로 거래원장(ledger)을 모두 암호화해 공개 장소에 기록하는 기술이다. 이러면 거래 확정에 제3자가 완전히 필요 없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영역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이제 우리는 아마존의 데이터 독점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는 아마존이 권력기관이나 재벌보다 우리를 통제하는 힘을 갖는 건 시간문제니 말이다.

오픈바자(openbazaar)는 바로 그런 온라인쇼핑몰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사용자는 물건을 사거나 팔기 위해 웹사이트를 방문하고 로그인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프로그램만 다운로드하면 된다. 거래는 비트코인으로 하는데 은행을 거치지 않고 수수료도 없다. 이 프로그램은 오로지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을 연결해주기만 한다. 은행도 없고 아마존 같은 기업도 중간에 끼어 있지 않다. 다만 블록체인 방식으로 거래 유효성을 검증한다. 이런 거래가 일반화하면 아마존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소유주 없는 계좌를 가질 수 있는 자동차

사실 대부분의 경우 나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이는 내가 아니다. 국가의 주민등록시스템, 학교의 학적부, 기업의 사원등록명부가 증명해준다. 조직이나 사물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스스로를 확인하려면 보통 세무서나 법원을 동원해야 한다. 자동차가 스스로를 확인하려면 정부가 발급한 자동차등록증이 필요하다.

기업을 예로 들어보자. 사실 영업부서와 회계부서가 굳이 한 회사에 소속될 필요는 없다. 회계부서 쪽에서 보면 영업부서는 제품을 판매하고 대금을 받아오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부인이고, 영업부서 쪽에서 보면 회계부서는 그 결과를 정리해주는 외부인이다. 두 부서가 같은 조직에 속한 이유는 떨어져 있으면 거래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서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일일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협상하고 그 모든 것을 정부나 은행 같은 중개기관이 확인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스스로 확인 가능하다면? 기업은 세포처럼 분열해 나갈 수도 있다.

모든 개체에 독립성 부여하는 기술의 힘

500여 년 전 이탈리아 북부에선 '복식부기'라는 낯선 회계장부 기입 방법이 등장했다. 거래가 많아지니 상인들의 편의를 위해 발명된 이 회계 기법은,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복식부기를 통해 회계는 거래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투명한 방식으로 기록되기 시작됐다. 기업주가 아니라도 실적을 투명하게 검증할 수 있으니, 주식회사가 가능해졌고 증권시장이 가능해졌고 글로벌기업이 가능해졌다.

중개인 없는 세상은 이제 가능하다. 이런 세상은 절차와 증빙과 관료 시스템에 지친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블록체인에 대해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질문은 여기 있을지 모르겠다. 중개인 없는, 모두가 독립적인, 100% 투명한 세계는 바람직한가?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