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디고 더딘 광복

독재자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것을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지만, 따지고 보면 그 혼란은 인간 심성의 복잡함이자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복잡함이며, 거기에 토대를 둔 온갖 사회적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노래에서건 영화에서건 시에서건 모든 종류의 새로운 발상법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2017-08-18     황현산
ⓒ뉴스1

다섯 살에 한국동란을 맞고 그 전쟁이 끝나면서 곧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해방둥이들은 학교에서 글을 배웠지만 노래도 배웠다. 교과서에 나온 노래가 아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에서 배워야 했던 노래 가운데는 〈조선의 노래〉가 있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가사가 이렇게 시작한다.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 할 때도 부른 노래라서 아마도 그 가사가 온전히 기억에 남아 있을 터이다. "백두산"으로 시작하는 반구는 조국의 지세와 그 크기를 말하고, 뒤의 반구는 그 아름다움과 유구한 삶의 역사적 전통에 관해 말한다. 새로 독립한 나라가 그 국민들에게 강조해야 할 모든 것이 거기 다 들어 있다. 독립을 맞아 새로 문을 연 학교가 이런 노래를 가르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런 애국가요보다 더 많이 마음을 움직인 노래를 학교 밖에서 배웠다. 이 노래도 제목은 잊었고 가사만 기억난다. "아버지 학교에 보내주세요. 저기 가는 저 학생 바라보세요. 검정치마 흰저고리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이 나는 부러워." 해방이 되고 나서는 곧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으니, 이 노래는 식민지 시대부터 불려왔을 것이 틀림없다. 해방 후에도 의무교육은 명색일 뿐이어서 학교에 일정한 운영비를 지불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월사금이라 하는 적지 않은 수업료를 매달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고 한다. 가난한 부모가 그 돈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어린이의 불행은 글을 깨칠 수 없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정치마 흰저고리와 가방이라고 하는 유니폼은 학생이 될 수 있었던 아이들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내고 그 신분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문화를 암시한다. 한 사회에서 선별된 사람들이 누리는 문화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억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방 후 이 억압을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체험했다.

사일구 혁명이 일어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생들에게 그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도 애국과 민주주의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사일구는 또한 못다 이룬 해방과 광복의 연장이고 또 하나의 단계이기도 했다. 이 혁명은 역사의 곡절 속에서 상실했던 기회를 되찾아, 제 뜻으로 설계하고 제 손으로 이행해야 할 나라다운 나라의 건설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해방과 민주의 의식이 사람들의 몸을 관통했고 이 충격은 감춰야 할 것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 뜨겁고 거센 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길고 긴 군사독재의 시작이었다. 독재자들이 견디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것을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렸지만, 따지고 보면 그 혼란은 인간 심성의 복잡함이자 그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복잡함이며, 거기에 토대를 둔 온갖 사회적 가능성과 창조력의 복잡함이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노래에서건 영화에서건 시에서건 모든 종류의 새로운 발상법이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 여유를 타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열정과 그 해방 다음에 늘 찾아오는 억압이라고 해야 하나. 사회는 분열되고 성장하던 민주의식은 억압을 당했으며, 어렵게 닦아놓은 통일의 길은 끊어졌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정의도 안전도 확보해주지 못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는 삼백 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배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았지만 나라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겨울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고 물었다. 내 주변에는 그 추운 겨울에 열아홉 번 스무 번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있다. 나라 아닌 나라에서 신생독립국을 세우는 심정이었을 터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