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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한 여성에게 바치는 사랑노래입니다." 최근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출판한 <영초 언니>라는 책 서문의 한 구절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대목이었지만 다 읽은 후 유독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존경', '사랑', '사랑노래' 등 시나 멋진 글귀에는 너무 평범해 선택받지 못할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나 감정, 사실이 낯설었고 특별했다.

'여자선배를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것이 낯설었다. 천영초는 1970년대 고려대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여성들만의 학습운동조직을 이끌고, 고문과 투옥으로 이어진 조직사건에 저자를 연루시켰던 선배다. 존경과 사랑은 힘들게 학생운동을 같이 하고 감옥에 가는 등의 경험을 하면 자연스럽게 싹트고 지속될 수도 있는 감정이고, 흔한 서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나는 여자선배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느낌을 길게 가져본 적이 없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박사논문을 위해 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20여명의 여성 활동가를 인터뷰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공통점 하나는 여자선배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었다. 특히 남녀공학의 경우가 심했다. 인터뷰 여성 거의 모두가 남자선배를 운동가의 모범 또는 존경의 대상으로 꼽았다. 그들이 학생운동의 진짜 주역이고 헌신적이었으며 이론적 무장 등을 더 갖추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조직도 군대나 비슷하게 남자를 위해서 디자인된 공간이고, 여성 특히 여대생이 표상하는 기질이나 행동방식은 격하게 부정되었던 문화가 주류였다. 여성들은 자기가 이전에 가졌던 모습이나 지속하고 있는 욕망을 회피하거나 억압했고, 여자선배는 그 대면하고 싶지 않은 모습을 쉽게 드러내는 존재였다. 일종의 부정적 투사가 일어나는 대상이었다고나 할까?

천영초라는 사람의 온전한 모습도 낯설었다. 본인은 구도자같이 엄격한 삶을 살면서도 허술하고 덤벙대는 후배의 모습을 '천재의 품성'이라며 귀여워한다. 반독재 투쟁에 헌신적이면서도 깔끔하고, 품이 넓고, 밝고, 유연하고, 게다가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 성숙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70년대와 80년대의 학생운동문화의 차이인지, 천영초라는 사람이 특이했는지, 아니면 서너살 나이 차이에서 온 여유있는 관계의 모습인지는 모르겠다. 나를 포함하여 내가 만난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20대의 어린 나이에 큰 시대적 과제를 짊어진 상황이었다. 과도한 책임의식과 개인성이 쉽게 묵살되는 집단 중심의 문화, 거대한 운동이념에 지배받으며 다들 풍성한 사람냄새를 풍기지 못했다.

'사랑노래'도 낯설었다. 서명숙이 경험한 천영초와 함께했던 열렬한 학생운동사를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랑노래를 구성하는 이름들, 특히 여성 이름은 하나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고려대를 다니지 않았던 이유가 클 것이다. 자타 공인 남성 위주의 대학으로 유명한 고대에서 정말 소수였던 여학생 중의 한 명인 이혜자가 78년 9월 당시 기준으로 가장 전설적인 시위를 멋지게 주도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내가 대학생이었던 시절과 몇 년 차이도 나지 않는데 그 일화는 공부했던 학생운동 정사에도 술자리 잡담에도 담기지 못했다. 80년대 여성 활동가의 인터뷰에도 없었다. 70년대와 80년대의 시간차가 그만큼 컸던 건지, 여성이어서 남성 중심의 운동 역사에 끼어들지 못했던 건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70년대는 주로 여성노동자투쟁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 낯섦은 가장 미안하게 느껴졌다. 주역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헌신성과 치열함, 도전의식으로 맹활약을 한 여성운동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대통령도 있고,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를 스스럼없이 선언하는 새로운 시대다. 여성운동진영의 색깔도 다양하고 세대차도 많이 나고 공유할 수 있는 내용도 점점 엷어지는 느낌이다. 나도 경험 못했던 '존경'과 '사랑'으로 여성운동가들에 대한 '사랑노래'를 부르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도 같다. 그것을 기대하는 게 온당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서명숙이 했듯이 영초 언니같이 기억할 사람을 다시 불러내어 역사에서 마땅한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사랑노래'라는 것은 확실하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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