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남자들 | 연애상대로 바라본 대선후보

만난 지 이주일째 갑자기 잠수를 타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아무 일도 아니라며 사람 답답하게 하기 시작. 뭐 기분 나쁜 일 있냐고 물어봤더니 "없다는데 왜 그러시죠?" 짜증 나서 나도 연락 안 했더니 1주일 후 온 카톡 하나. "그때 왜 두 시간 동안 답장을 안 했습니까? 1 지워진 거 다 봤는데 나 너무 마음 상했습니당" 황당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다 어쨌든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만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도 안 지나서 같은 일 반복.

2017-05-08     정소담

1.

"안녕하십니까. 샴슈솅 문졔인입니다."

우리는 곧 만나기 시작한다. 좋은 사람 같았다. 잘생긴 얼굴에 반한 것도 있다. 아니 사실 그게 컸다. 만나면서도 큰 탈 없는 연애였다. 잘생기고 반듯한 훈남 만난다고 부러워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꽤 있는데... 부정할 순 없지만 나는 막상 여자로서 뜨악하게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나한테 잘못하는 것도 없고 크게 속썩이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 뭐.

아, 그리고 1년 넘게 사귀면서도 내 친구들 이름 제대로 못 외운다고 몇 번 싸운 일이 있었다.

소소한 불만들이 쌓이고 자연스럽게 감정이 식어서 헤어졌지만 헤어진 후에도 나쁜 기억은 딱히 없다. 누가 물어보면 좋은 사람이었어, 라고 늘 말하게 될 것 같아. 근데 좋은 사람이긴 했는데 뭐랄까... 그래, 매력은 없었지. 미움도 없지만 추억도 없는. 딱히 미련도 남는 것도 없는. 어쩐지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

2.

고대앞 민족뽀집에서 일하며 그를 처음 만났다. 한번 와서 내 얼굴을 보더니 하루에 일곱번씩 쌀국수를 처묵으러 오는데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솔직함과 박력에 끌려 사귀기 시작. 상남자 스타일이라 무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은근히 재미있는 연애가 진행돼 사귀면서 점점 정드는 스타일.

데이트는 주로 포차에서 소주 까면서. 그런 쪽으로는 기대도 안 했는데 개그맨 수준으로 너무 웃김. 웃다가 포차에서 의자랑 같이 몇번 뒤로 넘어감.

나는 열받아서 정색하는데 갑자기 껄껄 웃으며 "역시 여자들이란 속이 좁구만" 혼자 사람좋은 보살 미소를 날리며 목구녕으로 소주를 꿀떡꿀떡 넘기는데 소주에 돼지살정제(발정제 아니고 정자 죽이는 살정제)타서 죽이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근데 또 뒤끝은 없고 사과는 잘 하는 스타일이라 싸움이 길어지진 않음. 결혼상대는 아닌 것 같아 결국 헤어졌는데 밤마다 같이 소주까며 깔깔대던 추억을 못 잊어 새벽마다 술먹고 전화질 좀 했었지.

코카콜라같던 남자와 헤어지고 고구마를 먹은듯 매일이 갑갑할 때 등 떠밀려 나간 소개팅에서 그를 만났다. 주선자 말이 '배울 점이 많은 남자'라는데 맞선도 아니고 소개팅 하면서 그런 코멘트가 붙는 게 너무 웃겨서 호기심에 한 번 만나봄.

만나보니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같이 술마시고 나는 술병나서 지각해도 매번 자기 할일을 다함.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 인생 앞길도 진지하게 설계해주고 조언해주고. 무엇보다 연애하면서 처음으로 서로 존대를 해봤는데 어색했지만 왠지 이게 바람직한 것 같았다.

짜증 나서 나도 연락 안 했더니 1주일 후 온 카톡 하나.

황당해서 기억도 잘 안 난다 어쨌든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만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도 안 지나서 같은 일 반복.

오빠 너무 소심하고 답답하게 구는 것 같아...요

집밖에서 이상한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을 열어보니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만세를 부르며,

"안철숩니닼~!!!!! "

"나 많이 변했습니닼~!!! "

갑자기 집앞에 찾아와 다시 만나자는데 무엇보다 그 바뀐 목소리에 너무 어이가 없다.

나중에는 너무 웃겨서 아 오빠 왜 이래ㅋㅋㅋㅋㅋㅋ이러지맠ㅋㅋㅋㅋㅋㅋㅋ (손으로 입막으며) (눈물콧물 흘리며) 야 이 미틴넘앜ㅋㅋㅋㅋㅋㅋㅋ 끆끅

야 대박 ㅋㅋㅋㅋㅋ 나 작년에 잠깐 만났던 의대 오빠있지? 오늘 집앞에 찾아와서 다시 만나자고 소리소리 지르는데... 무슨 루이암스트롱인 줄.

4.

졸업을 거의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알바비 못 받고 과제 팀플 독박 쓰고 엄마한테 전화로 욕먹고 똥씹 표정으로 집에 가는데 그 길에 우연히 만나서 같이 맥주를 한잔 마셨다. 샌님 스타일이라 남자로서 끌림은 크게 없었으나, 너무나 조근조근 합리적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는데 거기에 꽂혀서 사귀기 시작. (말빨로 알바비도 대신 받아다주었다!)

학창시절에는 두루두루 여러 사람이랑 잘 지내더니 매사에 합리 논리 찾아대고 그 고집스런 성격 때문에 회사 들어가서 상사한테 찍히고 미움 받음. 관계가 잔잔하게 나쁘진 않은데, 깊은 애정으로는 발전이 안되고 나도 취업 준비로 정신이 없는 데다가 왠지 앞날이 가시밭길일 것 같아 헤어졌다.

어쨌든 나쁜 오빠는 아니었어. 좋은 사람이었지... 쭉 잘 됐으면 좋겠네~

5.

문과 연애하고 헤어지니,

홍과 헤어지니,

안과 헤어지니,

유와 헤어지니,

다 처음 만난건데 "그런 놈 좀 그만 만나" 라는 화법으로 언제나 날 어리둥절하게 한다.

"언니 그래도 나름 다 잘난 놈들이었어. 왜 이렇게 내 전남친들을 욕해? 그럼 언니가 한번 소개해줘봐. 대체 누굴 만나라는거여"

한 번.

두 번.

끝.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