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공부란

친구들을 만나도 묻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묻는다. "공부는 잘해?" "몇 등이야?" "대학은 어떻게 할 거니?" 이어지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인정받기도 하고 또 무시당하기도 한다. 누군가 나에게 공부를 잘하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시험을 잘 보는 편이 아니고, 성적을 받아본 경험도 거의 없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에 암기를 잘 못하고, 정해진 답을 맞히는 것엔 정말 형편없다. 그렇기에 나는 공부를 못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기준에 빗대어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크게 낙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2017-05-02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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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이, 요즘 공부 열심히 하나?"

그러면 꼭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1등 했냐?"

할머니는 손자의 난처한 표정을 보시고는 더 이상 자세히 캐묻지 않으신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것이다. '이놈이 공부를 하긴 하는데 1등은 못하는구먼.'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여기서 '공부'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말이다. 아마 너무 당연해서인지도 모른다. "공부 잘해?"라는 질문에서 '공부'는 바로 '성적'을 의미한다는 것 말이다. 성적은 시험을 통해 얻는 것이고, 시험은 답을 맞히는 것이다. 그리고 답을 맞히려면 끊임없이 암기와 문제 풀이를 반복해야 한다. 결국 수많은 정보를 머리에 힘껏 쑤셔 넣었다가,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배설해버리는 행위를 얼마나 능숙하게 하느냐, 이것이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배움은 대부분 삶의 현장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 교감하거나 책을 통해 누군가의 인생을 간접 경험하며, 비로소 머리로만 알던 지식을 가슴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촛불집회이다. 그동안 민주주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처음 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래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온통 비민주적 의사 진행 절차와 과정뿐이었다.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미디어법 날치기,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그리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단까지.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을까. 내가 배운 민주공화국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의심과 회의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배움의 순간은 때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오기도 했다. 예컨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전철에서 말이다. 2016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열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아저씨를 보았다. 온몸을 바닥에 끄시며 연신 "고맙습니다"를 외치는....... 다리가 없는 그 아저씨는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짚으며 천천히 기어갔다. 열차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가도 마주치기라도 할세라 재빨리 거두었다.

나의 모든 배움은 사유의 기틀이 되었다. 공부를 거듭해갈수록 삶 깊숙이 뿌리내렸고, 쉽게 시들거나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공부는 대체로 즐거웠지만, 때로 고통스럽기도 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기쁨과 더불어 나의 자아가 산산조각 나는 아픔도 역시 존재했다. 이러한 시간들을 겪으며 나는 평면이 아닌 입체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더 다양한 삶의 모양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갔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공부가 실종된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죽은 지식을 앵무새처럼 암기했을 뿐,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이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공부, 즉 암기와 문제 풀이를 너무도 잘했던 이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막대한 재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남을 속이고 짓밟으며 호가호위했고,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았다. 어쩌다 이들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그 모양으로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한 공부는 그들의 인생에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성적을 위한 공부, 출세를 위한 공부, 성공을 위한 공부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이런 안타까운 역사가 지금도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를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학교는 하루도 다니지 않았지만』에 실린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