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극장화 | 홍준표 후보의 '박근혜 용서'라는 정치적 도구

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2017-04-03     강남순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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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국가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태극기 부대의 '국가 사랑'의 행위들은 그 어떤 비판적 성찰도 거부하는 몰지성과 인식적/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차용된다. 사랑과 용서-이 두 개념은 인간의 삶에 참으로 중요한 개념들이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에 의하여 지독하게 남용됨으로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 개념들의 소중한 의미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의 알러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개념들로 퇴락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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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구속은 이중처벌이라는 느낌이다. 이제 국민들도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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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용서의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 2) 언제 (용서의 적절한 시기), 어떻게 (용서의 구체적 방식), 이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3) 가해자/잘못한 자의 뉘우침,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뉘우침이나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용서는 가능한 것인가; 4) '용서자'가 용서를 하게 되는 경우, 용서자는 잘못된 일에 대한 '분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닌가 등과 같은 물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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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용서'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 시점에 이러한 '용서'를 호명하는 행위가 무수한 주말들을 촛불시위를 하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의에의 갈망을 표출해 온 '국민'들에게 어떠한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닐 것인가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조차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심한 우려를 가지게 된다. '대선주자'라는 타이틀을 지닌 정치가에게서 '권력에의 욕망'만 번득일 뿐,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은 찾아볼 수조차 없는 그 '성찰의 부재'가 참으로 암담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러한 '성찰의 부재'는 '홍준표'라는 특정한 정치인에게만 제한된 양상이 아니라, 사실상 현재 한국 정치계의 인지상태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