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끝내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짜르의 군인들은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짜르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고통을 달래주실 자애로운 짜르를 보고 싶다며 짜르의 궁전으로 행진해 오던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아울러 "탐욕스런 귀족들과 악랄한 관료들이 자애로운 짜르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지만 우리가 직접 가서 짜르께 호소하면 잘 들어주시고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의 소박한 환상도 그 피의 일요일에 완전히 박살이 났다. 오히려 짜르가 문제의 핵심이고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것이 러시아 안팎의 모든 이들에 백일 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2017-03-28     바베르크

그래도, 자애로우신 짜르를 만나러 간다는 열망에 달떠 있었던 일단의 노동자들은 가퐁신부라는 수상쩍은 이의 인도로 짜르께서 계신 궁궐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짜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를 들고 있었고, 아마도 러시아정교의 수장이기도 한 짜르를 찬양하는 노래도 불렀으리라. 이들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소박하고 온건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임금을 약간 올려 달라고, 조금 인간다운 환경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이렇게 짜르를 모시는(?) 노조를 인정하게 해 달라는 정도? 아니 그런 거 다 안 들어주어도 좋았으니, 자애로운 짜르께서 나오셔서 이들을 만나주고, 눈물을 닦아주면서 따뜻하게 안아주기라도 했으면 이들은 감격하지 않았을까?

짜르의 군인들은 짜르의 초상화를 들고서 짜르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의 고통을 달래주실 자애로운 짜르를 보고 싶다며 짜르의 궁전으로 행진해 오던 노동자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하얗게 눈이 쌓였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는 곧 이들 노동자들이 흘린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고, 이들과 행인들이 지르는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나중에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게 된 이 결정적인 날, 짜르는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아울러 "탐욕스런 귀족들과 악랄한 관료들이 자애로운 짜르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지만 우리가 직접 가서 짜르께 호소하면 잘 들어주시고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믿었던 노동자들의 소박한 환상도 그 피의 일요일에 완전히 박살이 났다. 오히려 짜르가 문제의 핵심이고 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것이 러시아 안팎의 모든 이들에 백일 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피의 일요일' 당시 니콜라이 2세의 초상을 앞세우고 행진하는 시위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라는 망명객.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실은 짜르의 이중간첩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고 있던 가퐁신부에게서 레닌은 바로 짜르가 무시하고 짓밟아 버린 러시아 노동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농민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짜르는 늘 그랬듯이 거짓 개혁의 약속으로 피의 일요일이 초래한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아 짜르가 다시 자초한 제1차 세계대전이란 일대 재난이 닥쳤을 때, 짜르의 적수 레닌은 가퐁신부와 피의 일요일에 억울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에게서 배운 바에 따라 그들의 방식으로 호소하기 시작한다. 레닌은 굶주린 노동자들에게는 빵을,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전쟁터에서 개죽음을 당하던 병사들에게는 평화를 약속했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에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그 병사들이 레닌 말대로 "발로 자유를 위해 투표"(=탈영)하기 시작하자 짜르의 체제는 뿌리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학살된다.

그 순간 짜르는 자신의 운명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것이 1905년 1월 22일 그를 만나러 왔던 순진한 노동자들을 만나주지 않고 신속하게 경비병들을 불러서 그들을 향해 총을 쏘게 하였던 때부터라는 것을 과연 깨달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