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로만 말할 수 있는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다

혁명은 아름답고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 열매가 곧바로 시민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준다. 젊은 학생들의 목숨과 바꾸어 독재자를 몰아낸 4·19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서 우리는 군부독재의 연장을 막기 위한 유례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희생을 목도했으나, 그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막지 못했다. 87년 민주화의 결말은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3당 합당이었다. 시민들은 늘 광장에서 승리하고 일상에서 패배해왔다. 광장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했으나, 일상에서 우리는 억눌리고 소외되었다. 그토록 많았던 광장의 동료 시민들은 내 삶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았다.

2017-03-16     이관후
ⓒ뉴스1

그러나 사랑이 그렇듯 혁명도 한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축제가 끝나면, 우리는 광장의 승리를 뒤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혁명은 아름답고 승리는 달콤하지만, 그 열매가 곧바로 시민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 준다. 젊은 학생들의 목숨과 바꾸어 독재자를 몰아낸 4·19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서 우리는 군부독재의 연장을 막기 위한 유례없는 민주화의 열망과 희생을 목도했으나, 그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막지 못했다. 87년 민주화의 결말은 노태우 정부의 출범과 3당 합당이었다. 시민들은 늘 광장에서 승리하고 일상에서 패배해왔다.

시민은 사라지고 유권자만 남았다. '닥치고 투표'라는 말은, 늘 사실이었다. 축제가 끝나면 선거철이었다. 말은 그들의 몫이었다.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처럼, 광장을 떠난 우리의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사랑했던 시민들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인어공주처럼 물거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묵묵히 찍고, 배신당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혐오하고, 종내는 무관심으로 돌아섰다. 신성한 한 표는 거짓이었다.

'왕은 죽었다. 국왕 만세!' 중세의 신민들은 한시라도 왕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다. 왕이 없는 세계는 암흑이었다. 왕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왕의 관이 닫히는 순간, 새로운 왕의 등극을 축복했다. 마치 그들처럼, 우리는 축제가 끝난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세계를 통치할 단 한명의 초인을 묵묵히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정부론'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의회의 역할을 '말하는 것'(talking)이라고 했다. 1861년, 밀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보통선거권의 확립과 그에 기반을 둔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의회라도 그들을 대표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50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오로지 투표를 통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이것은 비통한 일이다.

누가 다음 왕이 될지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껏 충분히 해왔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시민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닥치고 투표를 멈추고 광장의 말을 일상으로 가져와야 한다.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