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어 안의 '적폐'

헌재가 민주주의의 위기의식을 공유하니까 언어도 전향적으로 좋아지는구나. 이번 결정문을 들으며 느꼈던 흐뭇함은, 뒤이은 뉴스 해설 프로들을 보며 깨졌다. 여러 패널들이 '이제는 화해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누가 누구와 싸웠나? 범죄에 대한 수사와 처벌과, 그걸 촉구하는 평화적 시위가 있었던 것 아닌가. 태극기 극렬 집회? 그럼 그쪽을 분명히 지칭하고 자제를 촉구할 일이다.

2017-03-14     임범
ⓒ뉴스1

헌재의 결정문을 많이 봤지만 이만큼 선명한 건 드물었다. 2009년 날치기 처리된 미디어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은, 통과 과정에 하자가 있지만 입법부의 영역이어서 무효를 선언할 수 없다는 묘한 것이었다. 국방부가 불온서적을 지정해 병사들이 못 읽게 한 조처에 대해 2010년에 나온 결정도 그랬다. 문제의 책들이 불온도서인지 심사 대상 밖이어서 알 수 없지만, 불온도서 지정을 위헌으로 보기 어렵다는 거였다. 결정문은 길고 복잡한 복문투성이였다.

1988년에, 내가 치른 신문사 입사시험에 나온 작문 제목이 '5공 청산과 정치보복'이었다. 노태우 정권 초기에 전두환 전 정권의 비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수사가 진행될 때, '이제 그만하자'며 나온 말이 '정치보복은 안 된다'는 거였다. 권력형 범죄는 재발 가능성이 상존하고 그래서 엄정하게 사법처리해야 할 텐데, 거기에 '정치보복'이라는 묘한 말이 붙었다. 그때 더 수사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업들한테서 돈을 뜯었던 일을 밝혔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4천억원대의 비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뜯지 못하지 않았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정작 답답하고 궁금한 건, 군사독재 시절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권력형 범죄가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냐는 거다. 정계, 재계, 관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소극적으로 부역한 이들이 많다는 말 아닐까. 한국 사회는 공사 구별에 약하고, 특히 상부의 불법부당한 지시에 복종한 이들에 대해 관대하다. 혹시 불법부당한 지시에 복종하고 사는 이들과 그걸 용인하는 문화가 '양비론' '화해론' '정치보복 불가론' 같은 언어를 불러오고 있는 건 아닐까.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