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은 3단계의 과정을 통해 무너져 내렸다

2017-03-04     PyungSeok Koh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결과론적이다. 동서 냉전의 산물인 동서독이 하나의 독일이 되기까지 누구도 쉽게 예측하지는 못했다. 특히 통일 전 동독의 상황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더욱 그랬다. 사후적으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동독은 어떻게 무너져 내렸을까? 통일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사명이라면, 이 주제는 눈 여겨 봐야 할 것이다.

1. 동독은 조작된 경제 지표로 유지되었다.

“동독 정부는 1981년까지 서방 국가들로부터 100억 달러에 이르는 빚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동독 정부는 수입을 큰 폭으로 줄이고 수출을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한 서독 정부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차관을 들여와 힘겹게 나라를 지탱해 가고 있었다. …. 사실 다른 공산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동독은 소비자들의 천국이었다. 소련에 비해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의 비율이 두 배나 높았다. 그러나 다른 경제 지표들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었다. 1988년에 호네커는 1971년부터 시작된 주택 사업으로 건설된 300만 번째 아파트의 열쇠를 한 쌍의 부부에게 건네 주었다. 하지만 사실은 200만 가구의 아파트만이 건설되었을 뿐이다.”(책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저)

2. 동독은 선거 결과를 조작했고 개혁은 하지 않았다.

“…. 동독의 기독교 교회들이 드레스덴에서 회의를 열어 보다 민주적인 선거를 보장하는 법안을 마련하고 더 이상 선거 결과를 조작하지 말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1989년에 실시된 지방 선거 결과 역시 조작된 것이었다. …. 선거 결과 조작에 대한 동독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데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와 헝가리의 개혁 움직임에 동독 정부가 동참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책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저)

3. 동독 사회주의 정권은 현실을 끝까지 몰랐다.

“1989년 10월 2일 라이프치히에서 2만여 명의 국민들이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어 10월 4일에는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의 독재 정치를 비난하며 유엔 감독하에 자유 선거를 실시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동독 정부는 즉각 무력으로 대응했다. …. 10월 6일과 7일에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에서 1,000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체포되었다. 기념식에 참석했던 고르바포츠는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동독 정부에 촉구했다. ….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이후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수천 명의 국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넘어갔다.” (책 ‘케임브리지 독일사’, 마틴 키친 저)

동독 국민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격하게 진압했지만 차츰 동독 정부도 당황하기 시작한다. 집권 세력 중 당을 떠나는 이들이 생길 정도였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호네커 서기장을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는 지난 석 달 동안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국내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고 어설픈 핑계를 댔다. 새로 들어선 크렌츠 서기장 역시 개혁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결국 국민들의 철저한 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서베를린 쪽 국경이 열리고 크렌츠는 임명 50일 만에 물러난다. 동독 정권을 지탱하던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그대로 무너진다.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 명령을 군인들이 거부했고, 무시무시한 국가 정보국은 해체되었다. 정보 요원들은 자신들의 지난 일들을 부지런히 없애고 다니는데 집중했다. 이렇게 동독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