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과 만국의 소녀들

또 다른 소녀들이 있다. 한국의 남자들도 이 죄악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는 동안 저질렀던 이런저런 만행들을 우리는 이미 모르지 않는다. 한국의 소녀상이 중국 소녀상, 일본 소녀상, 베트남 소녀상이기도 할 때, 그 소녀상은 아베 같은 인간들이 돈다발 따위를 들고 감히 넘볼 수 없는 어떤 높이와 넓이를 얻을 것이다. 한국 소녀에게 참으로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는 만국의 소녀들에게도 절실하고 엄숙한 문제다.

2017-03-03     황현산
ⓒChung Sung-Jun via Getty Images

이를테면 일본인과 한국인의 자연관의 차이를 말할 때는 몇 개의 개념어로 두 나라의 문화 전체가 관통되기도 한다. 일본인이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극단의 세부까지 손질한 자연이어서 자연보다 더 자연이지만, 한국의 자연은 내버려둔 자연이기에 더도 덜도 말고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게 삶의 태도를 규정한다. 일본인은 하루에 두 번 네 번 목욕을 하지만 한국인이 보기에는 우스운 작태일 뿐이다. 한국인은 뚫어진 창호지를 겨울 찬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두고 산다. 저녁에 집에 들어와 버선을 벗어 창호지 구멍을 막았다가 아침에는 버선을 빼내어 다시 신고 나간다는 이야기 앞에서는, 젊은 세대야 그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내 세대 사람들이라면, 어떤 철학적 감흥까지 느끼게 된다.

그 책을 상기하게 된 또 한 번의 기회는 태평양 전쟁 시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과, 정확하게는 할머니들을 위한 소녀상 건립과 관련된다. 두 해 전에 한국과 일본은 갑작스럽고도 기이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일본이 위안부 생존 피해자들을 위해 100억원 상당의 돈을 출연하여 할머니들의 생활을 돕는 재단을 꾸리도록 돕고, 이후 한국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요구도 항의도 의문도 제기하지 않기로 '최종적 불가역적' 협약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합의에 따라 한국이 맨 먼저 져야 할 의무는 소녀상을 철거하는 일이다.

사실 전쟁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를 끌어안고 있다. 전쟁 위안부의 징집과 위안소의 운영은 넓게 보아 인류에 대한 범죄였고 좁고 구체적인 관점에서는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죄악이었다. 소녀상에서 한국 소녀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는 같은 시기에 같은 처지에 있었던 중국 소녀의 자리이기도 하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위안소에는 일본 소녀들도 있었다. 그들이 군국의 손아귀에 끌려갔건 제 발로 걸어갔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자들이 남자 노릇 한답시고 일으킨 전쟁의 처참한 희생자라는 점에서는 한국 소녀와 일본 소녀의 차이가 없다. 소녀상의 한국 소녀는 한국 소녀이면서 동시에 중국 소녀이고 일본 소녀여야 하는 이유가 그렇다.

경남 진주의 활동가들이 진주 교육지원청 뜰에 세운 진주평화기림상을 나는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그 소녀상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소녀상보다도 아름답다. 한 시대의 불행을 딛고 우뚝 서 있는 소녀는 벌써 희생자 이상의 어떤 존재다. 인류의 죄악을 알고 있고 자신의 불행과 함께 모든 여성의 불행을 알고 있기에 그의 표정은 단단하다. 그는 한국 소녀이면서 벌써 한국 소녀가 아니다. 그는 어두운 광장을 온기 약한 촛불로 밝혔던 역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중국 소녀가 되고 일본 소녀가 되고 베트남 소녀가 된다. 지극히 가녀린 촛불로 바닥을 단단하게 다진 민주주의만이 만국의 민주주의가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