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기억할 수 있는 오늘을 산다는 건

〈문라이트〉에는 더욱 비극적으로 부연할 수 있는, 훨씬 애절하게 채색할 수 있는, 보다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문라이트〉는 담담하고 묵묵한 영화다. 상황을 묘사하고 심리를 추측하게 만들지만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는다. 세 개의 개별적인 서사는 저마다 품고 있는 감정선을 독립적으로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서사로 떠밀려 보내지 않는다. 기승전결의 맥락 속에서 감정을 고양시켜 끝내 폭발시킬 뇌관 자체를 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2017-02-27     민용준

영화 〈문라이트〉를 통해 삼킨 여운을 깊게 내뱉어 봤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수많은 관계를 전전한다. 덕분에 두고두고 삶의 온기를 지필 사랑과 우정을 느끼며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어찌 됐든 시간은 흐른다. 증오와 경멸의 시제도 언젠가는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간다. 사랑과 우정의 시제 또한 그렇다. 성장과 함께 어떤 관계는 손쉽게 허물어진다. 다만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뿐이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이란 소년이 청소년으로, 성인으로 자라는 과정을 담아낸 이야기다. 하지만 소년의 성장 과정을 면밀히 따라잡는 영화는 아니다.

챕터의 끝마다 익숙한 마침표가 보이지 않고, 챕터 사이마다 소실된 서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서사적 흐름이 존재할 뿐이다. 첫 챕터에 해당하는 '리틀'에는 유년기의 샤이론(알렉스 히버트)이, 두 번째 챕터인 '샤이론'에선 청소년기의 샤이론(애슈턴 샌더스)이, 마지막 챕터인 '블랙'에선 성인이 된 샤이론(트래반즈 로즈)이 등장한다.

마약상인 후안(마허샬라 알리)은 마약중독자들이 득실거리는 마이애미의 슬럼가에서 우연히 만난 꼬마를 집에 데려와 밥을 먹이고 잠까지 재워준다. 좀처럼 말문이 없던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이 샤이론이라 말한다.

그러나 훌쩍 자라 청소년이 된 샤이론은 증오로 점철된 따돌림 속에서 곤혹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그래도 유년 시절부터 마음이 통했던 친구 케빈(자렐 제롬)은 그에게 모종의 위안을 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져들고 결국 감정의 바닥에서 분노를 쥐게 된 샤이론은 무언가를 결정한다.

〈문라이트〉를 이루는 세 개의 단편적인 서사는 하나의 인물을 관통할 뿐 제각기 분리돼 있다. 그런데 영화상에서 나열된 서사는 관객과 함께 현재진행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누군가가 지나온 인생으로부터 채취한 파편적인 기억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샤이론을 위한 영화다. 어떤 의미에선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샤이론들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파편적인 서사들을 과감히 이어 붙인 생경한 형식성으로 완성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문라이트〉가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선 영화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사랑과 우정과 함께 증오와 경멸의 시간도 깊게 각인된다. 다만 그 모든 감정은 과거가 된다. 언제나 그 이후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라이트〉를 연출한 감독 배리 젠킨스는 〈문라이트〉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라 밝혔다. 그는 샤이론과 마찬가지로 〈문라이트〉의 배경이 된 마이애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2세 무렵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젠킨스를 친아들이라 믿지 않았고 어머니와는 일찌감치 별거했다.

흥미로운 건 〈문라이트〉가 이런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문라이트〉에는 더욱 비극적으로 부연할 수 있는, 훨씬 애절하게 채색할 수 있는, 보다 극적으로 강조할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배리 젠킨스에게 〈문라이트〉가 담담한 기억으로 남겨진 시절이 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관통한 인생으로부터 길어낸 깨달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덕분일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통증은 시간과 함께 치유된다. 다만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삶은 자연스럽게 전진한다.

"공공연한 긍정은 때때로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려버리거나 신화적으로 창작돼버릴 수 있다. 결국 이런 방식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나는 배우들에게 '이 영화의 모든 것은 회색 지대이고, 캐릭터들도 회색이며 상황도 회색'이라고 설명했다. 이 영화에는 매우 어두운 추악함이 있지만 우린 그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스크린의 영상이 희미해질 때 그 너머의 세계관에 대한 감각은 되레 예민해진다.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킨다. 그럼으로써 영화적 감정을 스크린 속에 동결시키고, 영화적인 현실을 더욱 면밀하게 목격하도록 객석을 끌어당긴다.

마르고 작은 체격 탓에 놀림거리가 되는 샤이론은 일찍부터 경멸에 익숙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학교란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다. 심지어 부성은 부재하고 모성은 야박하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샤이론의 삶에 뜻밖의 숨을 불어넣는다.

결국 그 시절이 지금의 내 자아에 어울리는 빛을 찾도록 인도하는 여정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성찰과 누군가는 너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줄 것이라는 일말의 위안이 〈문라이트〉에 있다. 다만 쉽게 약속하거나 위로하지 않을 뿐이다. 후안이 샤이론에게 말하는 것처럼.

〈문라이트〉는 잊을 수 없는 고통을 지나온 인물의 인생을 승리와 극복의 역사로 미화하거나 성장의 신화로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인상적인 영화로 나아간다.

나를 아끼던 너의 마음과 너를 아끼던 나의 마음이 나를 해치던 너의 마음과 너를 해치던 나의 마음을 이겨내고 인생에 숨을 불어넣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담담하고, 묵묵한 인상으로.

그렇게 차분하고 은은한 위안을 남긴 채, 영화는 눈을 감듯 끝난다. 이미 샤이론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으므로. 객석을 나선 우리 또한 그럴 것이라는 위안을 얻었으므로. 달빛처럼 오랫동안 올려다 보고 싶은 여운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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