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이재용의 인생 이야기이자 대한민국 재벌 전체에 관한 이야기다

2017-02-18     김수빈
이재용 부회장은 2001년 3월 33살의 나이에 삼성전자 경영기획실 상무보로 본격적인 경영 수업에 나섰다. ⓒ한겨레

이재용이 그사이 어떤 개인적인 소회를 밝혔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조사를 받는 중에 온갖 생각이 들더라.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왔는지…. 나중에는 분노 같은 것도 치밀더라. 지금까지 나름 열심히 살아왔는데…. 나 자신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하고….” 검찰 조사를 받았던 한 삼성 임원이 털어놓은 얘기다. 이재용도 아마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자신의 지나온 48년 삶을 돌아보며 만감이 교차했을 듯싶다.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됐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동안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온 것인지? 어쩌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하지 않았을까?

지금껏 국민들의 머릿속에 박힌 이재용의 이미지는 세 건의 주요 사건에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삼성에버랜드 주식 헐값 인수 사건이다. 이재용이라는 이름이 국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9살 때인 1997년 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3세 승계를 염두에 두고 ‘세금 없는 대물림’에 착수한 사실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시점이다.

16일 현재 주식가치 6조8천억

삼성물산 지분의 진짜 가치는 삼성그룹의 두 축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의 지분을 각각 4.2%, 19.3%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용은 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생명→나머지 삼성 계열사로 이어지는 소유구조를 통해 삼성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지분이 그룹 경영권 장악을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면, 삼성에스디에스 지분은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종잣돈 확보용이었다. 에스디에스가 2014년 11월 상장되면서 이재용이 보유한 주식 가치도 급등했다. 이재용의 지분 9.2%의 가치는 16일 기준으로 918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1월 매각한 2% 지분까지 포함하면 1조2천억원이 넘는다. 세 오누이의 에스디에스 주식 가치는 모두 1조9천억원에 이른다. 이재용 오누이가 갖고 있는 삼성물산과 삼성에스디에스 지분 가치만 8조7천억원이다. 이들의 최초 주식 인수자금 546억원과 비교하면 20년 만에 159배의 수익을 기록한 셈이다.

이재용은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실 상무보라는 직위로 삼성에 입사했다. 그의 나이 33살 때다. 1995년 일본 게이오대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2000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니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위한 예정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신응환 삼성 구조본 이사가 e삼성 대표이사를 맡고, 구조본과 삼성 금융계열사 출신이 e삼성 등 인터넷 회사로 대거 이동했다”며 “후계자인 이재용의 성공신화를 만들어 3세 승계의 정당성을 높이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말했다.

실제 e삼성 지분을 인수한 계열사들은 불과 3년 만에 380억원대의 손실을 보았다. 경제개혁연대는 이재용과 e삼성 지분을 인수한 회사의 경영진을 모두 배임죄로 고발했다.

11년 만에 상무보에서 부회장으로

이재용은 이후 삼성전자에서 상무(35살)-전무(39살)-부사장(42살)-사장(42살)을 거쳐 2012년에는 부회장(44살)으로 승진했다. 불과 11년 만에 상무보에서 시작해 부회장까지 5계단을 뛰어오른 초고속 승진이다. 임원 승진까지 최소 20년 이상 걸리는 평범한 월급쟁이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별나라의 이야기다. 하지만 다른 재벌그룹 3세들의 경우 약관 30대에 이미 사장, 부회장으로 고속 승진을 하는 일이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이재용만 비판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재계에서는 이재용을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의 3세인 정의선 부회장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의선은 이재용보다 두살 어린 1970년생이다. 둘은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정의선은 서른다섯살인 2005년 기아자동차 대표이사 사장을 전격적으로 맡았다. 30대 중반에 그룹의 핵심기업 대표이사 사장을 맡은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마침 사장 취임 2년차부터 기아차 실적이 악화됐다. 특히 2년째인 2006년에는 영업적자가 1천억원을 넘었다. 정몽구 회장의 참모들은 “정 사장이 더 이상 큰 상처를 입기 전에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긴급 건의했다.

이재용으로서는 자신에게 씌워진 불법편법 상속증여의 상징이라는 이미지에 대해 억울해할 수 있다.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에스디에스 주식 헐값 인수로 대표되는 세금 없는 대물림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친과 가신들이 주도해서 벌인 일이다. `온실 속의 화초’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항변할 수 있다. e삼성 사업은 이재용 본인이 주도했다기보다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그룹 구조본이 총동원돼 추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콤플렉스 또는 스트레스

이재용이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비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부진은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외모는 물론 집요하고 지독한 성격까지 빼닮았다고 해서 ‘리틀 이건희’라고 불린다. 이부진은 최고운영책임자라는 직함만 그럴싸한 오빠와 달리, 2011년부터 신라호텔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 명실상부하게 최고경영자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감수하는 도전정신을 보여줬다. 이부진은 이재용의 구속에 따른 경영공백을 메울 유력 후보 중 하나로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결국 온실 속의 화초라는 이미지는 이재용으로는 억울한 측면과 책임져야 할 측면이 반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재용에게 일종의 ‘콤플렉스’ 내지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재용은 이제 박근혜·최순실에게 433억원의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되면서 ‘재벌 정경유착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부친인 이건희 회장도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50억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받은 적이 있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2015년 6월 이후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불공정 합병 비율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재용은 청와대와 국민연금공단을 상대로 합병 찬성 로비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회장 타이틀만 달지 않았을 뿐”

불법편법 상속증여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이재용에게는 억울하고, 온실 속의 화초라는 이미지는 이재용이 억울한 측면과 책임져야 할 측면이 반반이라면, 이번 정경유착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이재용의 책임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이재용은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쓰러진 이후 사실상 삼성의 총수 역할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고위임원도 “이재용 부회장이 회장 타이틀만 달지 않았을 뿐 업무수행과 권한행사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재용은 부친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다시 경영에 복귀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가신들의 뒤에 숨어서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할까? 이재용은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총에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등의 반대를 뚫고 합병안이 가까스로 통과된 뒤 미래전략실 임원이 축하인사를 건네자 “이게 축하받을 일이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는 이재용도 가신그룹들이 주도한 무리한 합병에 대해 걱정이 컸음을 짐작게 한다.

이재용이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등기이사로 선임된 것은 변화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시장에서는 책임경영의 시작, 온실 속 화초라는 이미지에서의 탈피로 받아들이며 긍정 평가했다. 하지만 등기이사로 선임됐을 뿐 정작 달라진 것을 찾기는 힘들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그러려면 왜 등기임원을 맡았는지 모르겠다.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의 실망이 너무 크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재용이 이건희 회장의 병환 이후 신속하게 본인의 새로운 경영철학과 비전을 담아 뉴 삼성시대를 주도했다면 지금 상황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재용의 문제는 한국 재벌 전체의 문제

이재용이 안고 있는 문제는 한국 재벌체제 전체의 고민과도 밀접히 맞닿아 있다. 한국 재벌은 2세 체제에서 3세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다. 외부 환경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경쟁은 치열해지는데 경영역량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 국민과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받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3세들에게 기업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다. 과연 해답은 무엇일까?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3세들이 경영을 잘하면 좋지만 잘못하면 그 위험이 너무 크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대주주는 감독 역할에 충실한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김상조 소장도 “총수가 최고경영자가 아닌 지주회사 이사회 의장을 맡아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그룹 경영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