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어디 안 가니까 | 전남 해남에서 대파·봄동 농사짓는 김순복 씨

20년 넘게 관행농사를 지으며 오락가락하는 농산물 시세에 마음 졸이고 독한 농약을 치는 것도 싫어 맘고생을 했다. 그러다 인근에 귀농한 사람들로부터 유기농사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때 유기농사로 바꾸지 않았으면 농사짓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을 거라고. 그러고 3년 뒤쯤 김순복 씨는 2006년 해남의 참솔공동체에 창립부터 함께했다.

2017-02-15     살림이야기

전남 해남 참솔공동체에서 대파, 봄동 농사짓는 김순복 씨

글 구현지(살림이야기 편집장) | 사진 류관희

겨울 노지채소의 고장 해남

"이번 겨울에는 눈이 한 번도 안 왔어요.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네. 해남은 바닷바람이 세서 그렇지 겨울에도 기온은 안 떨어지기는 하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더 따뜻해서 눈 대신 비가 몇 번 오고 말더라고."

농촌에서 겨울은 일이 없는 농한기라 하지만 해남은 겨울채소 때문에 1~2월에도 쉬는 날이 없다. 봄동과 대파가 한창이라 김순복 씨도 마을 '아짐'들 일곱 명과 함께 오전에는 창고에서 채소 포장 작업을, 오후에는 밭에 나가 수확을 하느라 바쁘다.

2년만 살자던 게 자연에 반해 34년째

"친구들이 기가 막혀 했다니까. 나도 내가 자연을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요. 농사일이 힘든데도 그냥 산이랑 들이랑 바라보고만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계속 있고 싶고 그런 거예요. 처음 왔을 땐 물도 우물에서 길어다 먹어야 하고 생활이 아주 불편했는데 그래도 흙에서 뭐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더라구요."

그렇게 쭉 이 마을에서 농사지은 지 34년째. 물려받은 땅은 별로 없었지만 대신 남편과 둘이 부지런히 개간을 해서 늘렸다. 3만 3천 m²(1만 평)에 벼, 보리, 콩 농사를 지었다. 20년 넘게 관행농사를 했다. 자연은 좋았지만 농사일은 좋은 줄을 잘 몰랐다. 소득도 별로 없고 농산물 시세가 오락가락하여 마음을 졸이고. 독한 농약 치는 일도 싫었다. 한번씩 도시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뭐가 힘들었나 슬펐나 이런 이야기는 하기 싫고 지금 즐겁고 좋은 일만 생각하려고 하는데, 그때 애들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준비만 하다가 정작 같이 한살림 농사를 못해 본 게 너무 아쉬워요. 사람 좋아하고 성실하고 농사 공부 열심히 하고... 한살림 농사에 딱 맞는 성품이었는데."

20년 넘게 관행농사를 지으며 오락가락하는 농산물 시세에 마음 졸이고 독한 농약을 치는 것도 싫어 맘고생을 했다. 그러다 인근에 귀농한 사람들로부터 유기농사에 관해 알게 되었다. 그때 유기농사로 바꾸지 않았으면 농사짓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을 거라고. 그러고 3년 뒤쯤 김순복 씨는 2006년 해남의 참솔공동체에 창립부터 함께했다.

2월 초에 봄동과 대파가 끝날 즈음에 월동배추를 낼 예정이다. 지난해 가을에 비가 많이 와서 김장 배추는 잘 안 되었다던데 월동배추는 실하게 여물었다. 그다음에는 호박을 심는다.

마당에 세운 닭장에서 10여 마리 닭을 키워 매일 달걀을 얻는다. 먹을거리는 대개 자급한다. 가족 먹을 것과 자녀들에게 보내줄 것 해서 벼농사를 2천 ㎡(600평)가량 짓고, 텃밭에서 먹고 싶은 채소를 키운다. 며칠 전에는 봄동이 제철인데 일하는 사람은 못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간장과 다진 마늘,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 먹었다. 봄동이 좋아 어떤 양념에도 맛있다고.

새들이 먹고 남으면 사람이 먹고

봄동은 10월에 파종하는데 날씨가 추울 때 자라니 병도 벌레도 거의 안 생겨 손이 별로 안 간다. 올해는 날씨도 기가 막히게 잘 맞아서 제때 해가 나고 제때 비가 와서 밭에 따로 물을 댈 필요도 없었다. 다만 새들이 너무 좋아한다는 게 흠일까. 오늘도 봄동밭 가장자리에 새들이 계속 날아들어 쪼아 먹고 있었다. 김순복 씨는 따로 새를 쫓거나 하지도 않는다.

반면 대파는 5월에 파종하여 여름을 아주 힘들게 난다. 대파는 벌레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서 관행농사로 짓는 걸 보면 농약에 절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유기농으로 키운다고 다르지 않다. 벌레가 들끓는데 손으로 잡고 유기농 제제를 뿌려도 감당이 안 된다.

매일매일 일기예보 확인하는 게 농사 비결

"농사는 자연이 다 하는 거지, 사람이 억지로 어떻게 못 해요. 사람이 비 오게 할 수가 있나 바람 불라고 할 수가 있나."

또 몸이 힘들지 않게 하고 싶은 만큼만 하고 쉬고 싶을 때는 쉰다. 회사 다닐 때에는 출퇴근 시간이나 주어진 일에 내가 맞춰야 하지만 농사는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더라고. 그 두 가지가 비결이면 비결이라고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게 보통 내공이 아니다. 십 수 년 성실하게 쌓아 온 경험치를 활용한 농사다.

"저기에 지난해 여름에 녹두를 심었다가 완전히 망쳤어요. 1천500평(4천958m²)을 심었는데 병충해 때문에 하나도 못 건지고 다 죽었어요. 비닐 멀칭을 했던 걸 다 어떻게 치우나, 수확도 없고 품삯만 나가겠구나 하고 걱정했는데, 밤에 멧돼지가 와서 지렁이를 잡아먹느라고 온 밭을 다 헤집어서 비닐을 다 뽑아 놓은 거예요. 그냥 비닐을 슬슬 말아서 거두면 되게 해 놨더라고요. 멧돼지가 농사도 도와준다니까요."

김순복 씨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그림을 그린다. 주로 자연과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다. 삼 년째 색연필 그림을 그리며 어느 색이 가장 많이 닳았나 보니 녹색과 갈색이다. '내가 이 색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렸다. 처음에는 스스로 어린아이 그림 같아 부끄럽기도 했는데 이제는 구도나 색감에 경험이 쌓여 능숙해진 걸 느낀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한살림 생산자와 조합원이 함께하는 팜파티에 전시도 한다.

낮에는 농사, 밤에는 그림

김순복 씨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가 좋았다. 초등학생 때 미술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고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일찍 꿈을 접었다. 사십 년 넘게 묻어 두었던 꿈을 다시 펼치게 된 건 삼 년 전부터다.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는 두 딸이 2014년 생일에 전문가용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선물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그림 맘껏 그려 보라고. 그때부터 매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벌써 50장짜리 스케치북 3권을 채웠다.

한살림에서 소식지에 연재한 그림을 모아 <2017 한살림 생산지에서 온 열두 달 그림 달력>을 만들었는데, 조합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아 보름만에 800부가 다 팔렸다. '농부화가 김순복 씨가 그린 달력' 이야기가 지역신문에 실렸고 곧 일간신문과 TV 방송 등을 통해서도 알려지면서 전국에 소문이 났다.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글과 그림을 같이 묶어 어른을 위한 그림책 같은 걸 내 보고 싶다는 꿈을 쭉 품어 왔다. 특히 한동네에서 살고 같이 일하는 아짐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30년 넘게 매일 봐도 여전히 새로움을 발견하는 이곳의 자연이 좋고, 안정적인 값과 수요를 책임져 주는 한살림 덕분에 농사짓는 데 큰 걱정이 없어 좋단다. 이렇게 좋은 농사를 자식들이 이어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자기 좋아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앞으로도 동네 아짐들처럼 오래오래 하고 싶은 만큼 농사짓고, 틈틈이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살 작정이다. 가끔씩 농사가 잘 안되어도 "땅은 어디 안 간다"는 게 김순복 씨의 믿는 구석이다.

"여름내 벌레를 이기고 가을부터는 추위를 견디며 쑥쑥 자라는 대파의 생명력이 나랑 닮았어요."

* 이 글은 살림이야기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