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남성들에 대한 멜로드라마틱한 재현을 거부하는 '문라이트'가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인 이유

2017-02-06     김도훈

배리 젠킨스 감독의 ‘문라이트’(2016)에서 리틀은 마이애미의 거친 동네 리버티 시티에서 자라나며 괴롭힘, 빈곤, 결손 가정, 자기 정체성,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한다.

‘다르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받아야 했던 모든 리틀 같은 사람들에게 ‘문라이트’는 옛 상처를 다시 아프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한편 치유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문라이트’는 지금 리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건을 나아지게 할 여지를 열어준다. 젠킨스가 영화를 통해 설교를 하려 했다거나, 도덕적 교훈을 담으려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담담히 보여 줄 뿐이다.

젠킨스는 불리한 입장에 처한 게이 남성들에 대한 전형적인 멜로드라마틱한 재현을 거부함으로써 아감, 남성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를 겪은 모든 리틀, 샤이론, 블랙들에게 이 영화는 괜찮다, 너는 정상이다, 너는 계속 성장하고 변화한다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다. 샤이론은 자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운이 나빴지만, 그는 자신의 분노와 걱정을 잠재운다. 애쉬튼 샌더스는 늘 긴장한 표정(보더라인 분노)으로 이를 잘 담아낸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도 모르는 젊은 남성이지만 이 영화의 가장 도발적인 장면에서 감사를 느낀다. 가장 친한 남자 친구 케빈(자렐 제롬)과 함께 달빛 아래 해변에서 죄책감이 동반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장면이다. 이것이 자신이 게이라는 확인이기 때문에 그가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는 경이로움을 느껴 미소를 짓는다.

보수적인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을 가장 불편해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케빈은 후회, 자기 증오, 수치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성인으로서 재회하고, 그 이야기를 하고, 똑같이 로맨틱하게 서로를 포용한다. 젠킨스의 이 걸작이 아름다운 것은 이 지점이다. 모든 리틀, 샤이론, 블랙에게 이 영화는 어딘가 너를 위한 케빈이 있다고 말해준다. 가장 친한 흑인 남자 친구가 연인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뒤틀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술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진실을 표현할 뿐이다.

마지막에 그녀와 샤이론이 화해하는 장면은 아마 가장 감동적인 장면일 것이다. 여기서 두 사람은 울며 포옹한다. 폴라는 어머니로서 실패했다고 털어놓으며 용서를 빈다. 샤이론은 폴라를 용서한다. 젠킨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아무리 괴롭다 해도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우리를 괴롭게 한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은 자유로워짐의 상징이다. 샤이론 자신도 마약 딜러가 되긴 하지만 – 사회가 얼마나 개인을 형성하는지를 보여준다 – 그는 적어도 예전보다는 나은 위치가 된다. 젠킨스는 모든 걸 회색으로 보지는 않고, 다른 리틀, 샤이론, 블랙들도 자신의 비젼을 추구할 수 있다.

뉴욕 타임스의 A. O. 스콧은 '문라이트는 올해 최고의 영화인가?'라는 리뷰에서 ‘문라이트’가 “흑인의 몸의 존엄, 아름다움, 끔찍한 취약성, 흑인들의 삶의 실존적이며 육체적 문제에 대한” 영화라 정말 시기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리틀, 샤이론, 블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지만 그가 겪는 이슈들에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아프리카 출신 남성들을 반영한다. 화면에서 자기 자신이 반영된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이 진공 속에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괴로움과 경험이 인종의 맥락에서 더욱 정당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고,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영화의 힘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For Every Little, Chiron, Black of “Moonlight”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