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 그 '불편함'에 대하여

이 '소녀상'이 어쩔 수 없이 환기시키는 '능욕당한 순결한 소녀'라는 이미지는 전쟁범죄자들의 죄상을 묻는 일에 적합한 상징성만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이미지는 흔히 식민지 침탈을 당하거나 패전을 당하거나 하는 특정 민족(국가)의 불행한 상태를 환유하여 '민족주의'라는 비이성적 환상을 조작해 내는 데에도 적합한 상징성을 갖는다. 더 나아가면 여성에 대한 고착된 관념 -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고 순결해야 하고, 다른 '놈들'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비자율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라는 남근주의적 관념을 재생산하는 또 다른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바로 나도 공감하는 바 이 '소녀상'이 주는 불편한 느낌의 근거일 것이다.

2017-01-17     김명인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 이어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에도 '소녀상'이 세워졌다. 그 '소녀상'이 일제 식민지시대 말기 이른바 '대동아전쟁' 시기에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간 '종군위안부'들의 형상한 조형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미국 어딘가에도 세워져 있고, 일본 우익정부가 워낙 이 상징조형물에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또 그럴수록 '보호'되어야 하는 명분을 더 강하게 얻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이 조형물은 종군위안부와 관련한 기억투쟁이 벌어지는 뜨거운 '현재적 장소'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 '종군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의 존재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기억파'의 일원임에 틀림없지만, 이 '소녀상'과 관련해서 일본정부나 일부 일본인들이 느끼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나 역시도 그 느낌을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 불편함은 올바른 것일까? 민감한 문제이지만 피해 갈 문제는 아니다.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미성년의 여성들을 이 추악한 성폭력제도의 희생양으로 동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소녀위안부'들이다. 성인여성이라 해도, 설사 자발적이었다 해도, 또 극단적으로 말해 일종의 매춘이었다 할지라도, 여성들이 남성군인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제도적으로 동원되는 일은 끔찍하고 야만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아직 인격적으로는 물론 성적으로도 자기 결정권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는 어린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성노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보편적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소녀위안부'는 일제에 의해 수행된 이 성적 착취제도의 야만성과 추악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그런 점에서 오늘의 이 '소녀상'은 굳이 일제에만 한정되지 않는, 모든 추악한 전쟁범죄의 비인간성을 상기시키는 조형물로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부산 동구 일본 영사관 앞에서 열린 '소녀상' 제막식.

Käthe Kollwitz, Farewell Waving Soldiers' Wives (1937) © spartacus-educational.com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것을 불편하지 않다고, 혹은 불편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어쩌면 이 '소녀상'의 이처럼 불편한 즉물성 자체가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총체성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그 자체로서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어온 바로 그 불안함과 불완전함과 불편함을 대신 웅변하는 형상으로서, 또한 모든 기억투쟁들이 가지는 명확한 적대성과 그 못지않은 모호성과 다의성들이 소용돌이치는 '현장'으로서 격렬한 존재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로 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의외로 많지가 않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