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부부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방법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형이 워낙 좋아하는 밴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콘서트를 열었었는데, 형 몰래 티켓을 예매해 깜짝 선물한 적이 있다. 1부 무대가 끝나고 밴드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빈 무대를 대신 채워줄 초대 가수가 나왔는데, 시간을 더 때워야 했는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다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 여기 또 불쌍한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 날 남자 둘이 콘서트장까지 오시고, 이 불쌍한 두 남성분께 위로의 박수 부탁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친히 우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찍어 주었다. 당연히 그 조롱의 대상은 게이 커플이 아니라 솔로인 두 이성애자 남자였겠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도 분한 2부 공연이었다.

2016-12-23     김게이
ⓒdolgachov via Getty Images

어찌 보면 큰 욕심도 아니지 않나. 무슨 날 무슨 날에 뭘 해야 더 로맨틱하다는 학습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충성스런 부역자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일 뿐인데. 요즘 안 그래도 이런 거에 휘둘리는 사람들은 초콜릿 회사와 숙박 업체들의 거대한 사회 잠식에 놀아나는 거라는 진보적 비판이 많은 가운데, 없는 돈도 만들어서 쓰는 나 같은 게이 보수층조차 흔들린다면 대한민국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한 번은 화이트 데이에 맞추어 그때까지 우리 둘이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비싼 곳을 예약했었다. 나름 내가 취업도 했겠다 이제 월급다운 쥐꼬리도 받고 있으니 이런 날 형이랑 근사한 저녁 한 끼는 먹어도 되지 않나 싶었다. 무려 디너에 무려 코스였는데, 그 비싼 돈 주고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한 시간 남짓의 이탈리안 요리는 형과의 9년 연애사에서 최악의 식사로 꼽을 만하다.

또 한 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형이 워낙 좋아하는 밴드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콘서트를 열었었는데, 형 몰래 티켓을 예매해 깜짝 선물한 적이 있다. 우리 둘은 이미 그 해 치의 부지런을 바닥까지 소진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게으를 수밖에 없었는데, 굳이 다음해 치 부지런을 당겨 써서 결국 스탠딩 객석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덕분에 내 지금의 몫이 아니면 설레발 쳐서 부지런 떨지 말자, 라는 오랜 교훈을 다시 한 번 체득할 수 있었다. 1부 무대가 끝나고 밴드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 빈 무대를 대신 채워줄 초대 가수가 나왔는데, 시간을 더 때워야 했는지 관객들을 대상으로 말을 걸다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 여기 또 불쌍한 분들이 계시네요, 이런 날 남자 둘이 콘서트장까지 오시고, 이 불쌍한 두 남성분께 위로의 박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친히 우리를 손가락으로 콕 콕 찍어 주었다. 당연히 그 조롱의 대상은 게이 커플이 아니라 솔로인 두 이성애자 남자였겠지만, 그래서 더 슬프고도 분한 2부 공연이었다.

음력으로 쇠는 남편의 생일이 이번엔 연말에 있다. 형이 노래를 부르던 스마트 워치를 생일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로 몰래 준비하기로 진작에 마음먹고 있었으나, 얼마 전 블루투스 모델이 아닌 LTE 모델을 사고 싶어한다는 걸 알아 차리고 나서는 그냥 깜짝 선물 하는 걸 포기했다. 명의 문제도 있고 해서 알아서 개통하라고 어제 이야기했더니, 형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벌써 크리스마스고 생일이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아이허브에서 실리마린 밀크시슬 같은 거 주문 안 해도 되던 20대 초반에 꿈꾸던 것과 꼭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낼 형과의 9번째 크리스마스가 세상 부럽지 않게 행복할 거란 걸 잘 안다. 콘서트 갔던 그 해 빼고 나머지 8번의 성탄절처럼, 올해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그리고 해피 버스데이!

(www.snulife.com 에 게시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