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목소리'는 처벌받아야 하는가 | 〈제국의 위안부〉 형사재판 최후진술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시도한 일은 오로지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말했으나 잊혔던 목소리를 그저 복원하고, 세상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2016-12-22     박유하
ⓒ뉴스1

자료 링크)

참고자료는 결심 이전에 160개 이상 제출했고,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더 언급한 자료들을 '추가자료'라고 썼다. 본문과 함께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아직 미완성인 부분이 있지만 양해해 주시면 좋겠다.

하긴 검찰과 관계자들은, 기소 이전에 조정을 권유하며 '사과, 한국어삭제판 절판, 일본어판 삭제'를 요구했고, 나를 비난해 오던 어떤 교수는 최근에 '일본어판 절판'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응하기 어렵다고 한 건 일본어판 삭제/절판뿐이다.

내가 이 구형에 절망하는 것은, 구형 자체가 아니다. 나의 모든 반박자료들을 봤으면서도 못 본 척하고 중죄를 내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검사의 몰양심 혹은 경직성이다. 물론 그 배후에 있는 것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주변인이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1. 고의성(犯意)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 〈제국의 위안부〉를 쓰기까지

1) 저는 25년 전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 증언을 하러 오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통역을 자원봉사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울부짖는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며 눈물 흘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위안부 문제는 이 25년 동안 저의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2) 세월이 지나 2004년에, 민족주의를 넘어 한일문제를 논의하는 한일지식인 모임을 만들게 되었는데, 제가 이 모임을 만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도 사실 위안부문제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문제적 교과서를 반대하는 모임 대표이기도 했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와 의기투합해 모임을 만들면서, 제일 먼저 함께해 주기를 부탁했던 이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 교수였던 것도 그래서이기도 합니다.

3) 실은 저는 그 심포지엄을 열기 직전에 〈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 /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냈었습니다. (위안부문제 관련은 2장. 재판부 기제출 참고자료 98. 이하 '참고자료'로 표기) 정대협의 운동방식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저의 책을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몇몇 언론의 리뷰를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86,87)

예를 들면 2010년,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던 해,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조차 위안부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때입니다만, 저는 일본 언론을 향해 그 해에 '일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위안부문제'라고 썼습니다(참고자료 59. 교도통신 칼럼. 2010)

다시 말해,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본을 향해, 위안부문제를 다시 환기시키고,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 책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책으로 먼저 나오게 된 건 한국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래는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안부문제를 위해 오래 애써온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가 고발당하자 '일본에서 위안부문제를 환기시키는 순기능'이 있다고 언급한 것은 저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기사 링크)

이 심포지엄의 타이틀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서〉였고, 주최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했거나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 한국 정대협 첫 대표인 윤정옥 교수와도 친분이 있던 여성학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저의 입장을 와다 교수와 비슷한, 다시 말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온 인물로 이해해 주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무렵 저는 연구년을 맞아 일본에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오래 교류해 온 여러 학자들과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자주 했고, 돌아오기 직전에는 도쿄대학에서 또 다시 접점을 찾기 위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의 구체적인 제안은, 그저 '위안부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위안부담론과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으니 당사자를 포함한 한일협의체를 만들고 일본과 대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이 문제에 관한 저의 관심과 행동과 집필은 전부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존 상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학자의 당연한 본분이자, 한국에 거주하면서 일본을 가르치는 일본학 전문가로서,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생산적인 대화가 시작되고 올바른 비판도 가능하다는 것이, 한일관계 관련 첫 책을 내놓을 때부터 저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생각에서 쓴 책입니다.

2. '위안부 할머니를 비난하는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에 대해 | 일본의 평가

하지만 지원단체가 고발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위안부〉역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참고자료 5-12, 신문서평 등)

그건 우선, 2014년 가을에 일본어판이 나온 이후 가장 먼저 서평을 써 준 곳이 이 문제에 오랫동안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아사히신문이고, 아사히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는 도쿄신문, 그리고 중도적인 마이니치 신문 등이 서평, 칼럼, 사설 등을 통해 긍정적으로 언급해 주었다는 사실이 보여 줍니다.

"군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성적봉사를 강요당한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의 뒤에는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작가, 호세이대 교수, 웹론자 2016.1.18.)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 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2015) (참고자료 71,72)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2016.3.28)

"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보아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민지지배 폭력성의 진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학 교수,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2016.3.28)

"일찍이 구미를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 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이상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평의 일부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일부 우익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저의 책을 이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그 어떤 보수 신문도 이 책의 서평을 게재하지 않았고, 물론 상을 주겠다는 곳도 없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가쿠인대학 교수,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2016.3.28)

"이러한 구조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2016.3.28)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

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한결같이 제국의 위안부 안에 있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읽어 주었고 바로 그 부분이 저의 책이 일본에서 평가받은 이유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하는 일본의 전후],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 박유하). 또 이들 이외에도 비슷한 시각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글모임집인 책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듣고 있습니다.

고발 직후, 아직 책이 일본어로 번역되기 전에도, 자국을 비판해 온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선생이 저에 관한 메시지를 가처분 재판부에 보내 준 것도(참고자료 140), 저의 그간의 작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 위안부를 폄훼하는 책이라는 주장에 대해 | 한국의 평가

그리고 고발 이후에도, 일일이 다 찾아보지 못할 만큼 쏟아져 나온 시민/지식인들의 탄원서, 성명, 서평, 페이스북, 유력잡지 특집 등에서의 발언/글과, 진실을 전하고자 한 기자들의 서평과 기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4-34,36-44,66-2, 73-1,2, 75, 76-1-10, 79-85,91-95, 124-139, 142-155.)

재판장님,

많은 이들이 읽어 주기를 바라 일반서로 쓰기는 했지만, 사실 저의 책은 내용도 문체도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사실 여부 이전에, 책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독해력이라고 합니다. 그 독해력에서 한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뛰어난 분들이, 저의 책을 정확히 읽어 주시고 옹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고발 이후는 물론 고발 이전에 나온 비판들에 대해 저는 이미 대부분 대답했습니다. (이재승, 젊은 학자들, 정영환에 대한 답변. 참고자료 62-1-4,102-105. 106, 110, 링크) 지원단체뿐 아니라 학자들마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다독가로도 유명한 한 작가와 제가 반박한 자료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110, 132) 아직 완전한 형태가 아닌 글도 있지만, 그들이 어떤 왜곡을 했는지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 다른 목소리의 억압 | 고발 이유

그 직접적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유지들과 함께 연 2014년 봄 심포지엄입니다. 그리고 고발을 앞당긴 것은 책을 낸 이후 제가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는 분을 비롯한 할머니들 중 가장 가까웠던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의 고발장에는, 〈 화해를 위해서〉와 심포지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유하의 향후 활동을 막아야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링크)

하지만 제가 책을 쓸 때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할머니들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와 달라진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나온 증언집 등이 현재의 증언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일관계가 나날이 험악해져가고 위안부할머니들이 세상을 뜨는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책을 세상에 내보내 다시 논의해야만, 위안부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전, 오래 전에 만난 분들의 기억은 제 안에 오롯이 남아있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진짜 하려면, 할머니한테 직접 사죄하고 할머니한테 직접 돈을 손에 쥐어줘야지, 왜 정대협을 끼고' 진행하느냐면서, '입법 하겠소 무슨 법 하겠소...... 그런 거 다 소용없으니까. 할머니들하고 이렇게 직접, 우리 주소 있고 전화번호 있고 계좌번호 있지 않아요, 그거 불러달라'고 하면서 상대를 하면서, 할머니들이 '이 방식으로 우리가 준비했으니까 할머니들이 받으시고 싶으신 분이 받아가세요.' 하면, '이제 우리 둘 다한테 안 받는 사람은 이걸로 끝난다. 하면 다 받을 거예요. 그렇게 꼭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자료 65)

또다른 분은 제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일본의 어떤 사죄와 보상을 원하시는지, 법적책임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묻자, '법적이고 뭐고 그런 건 우리는 모르고, 다 떠나서 우선은 보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점연 할머니. 2014년 심포지엄 영상, 참고자료 166)

그래서 저는 그런 목소리를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책을 낸 다음 해 봄인 2014년 4월 말에 연 '위안부문제 제3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입니다.(참고자료 35, 영상자료 추가)

물론 결코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는 큰 부담이었지만 묻혔던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전해지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논의를 새로 시작해 준다면,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처음으로 공적인 장에 나타난 '다른'목소리들에, 한일 양국언론은 크게 주목해 주었습니다. (링크)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던 걸까요? 왜 그분들은 자신의 생각을, 시위에 나오시는 다른 분들처럼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요?

재판장님,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게 할머니를 비난하려는 고의 같은 것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지만, 나중에 말씀 드리는 것처럼, 할머니들 역시 이 문제에 관한 담론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야말로 이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공판에서 이미 보신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동원정황과 위안소에서의 생활과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에프론(국방부인회 제복) 두르고 군인을 위한 천인침(하얀 천에 천명의 여성이 놓은 바늘땀을 받는 일. 군인의 무운장구를 비는 부적 같은 것) 을 받았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자료 4 외)

위안부 동원에 사기적 수법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속인 것은 일본군이아니라, 업자뿐 아니라 직업소개소이기도 하다는 것이 기제출 증거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경찰도 문제시하고, 여성들이 속아 팔려가는 일이 없도록 단속했던 것입니다. (증거 3-1)

나아가, 이들이 말하는 생존해 계신 할머니 나눔의 집의 다른 분들 구술록을 보면, 원고 측이 제출한 자료입니다만, 이른바 '군인이 강제연행'한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모르는 조선인에 의한 납치, 김군자 할머니는 수양아버지에 의한 인신매매, 김순옥 할머니는 아버지가 종용한 인신매매, 강일출 할머니는 형부에 의해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가게 된 케이스, 박옥선 할머니는 스스로 갔는데 속은 케이스입니다.(증거 자료 50) 강일출 할머니가 '보국대'에 갔다고 말씀하신 건, 이분들이 모집 당시부터 '애국'의 틀에서 동원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심포지엄에서도 그런 내용을 제안했습니다.

링크)

5. 검찰/원고 측의 오독

〈제국의 위안부〉가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는 이미 지나칠 만큼 충분히 제출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을 조금만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먼저 검찰이 문제 삼는 '긍지'와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 '긍지'의 대상

검찰은 저의 책이 '자긍적 애국심'을 말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책에 그렇게 쓴 적이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긍지', '자긍'이라는 단어는 전부, '애국' 자체라기보다 그 어떤 역할이건 자신이 필요시되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은 분명 부조리한 국가의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런 사회적인 인정은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잊고 삶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싱가포르 근처에는 거의 6000명의 가라유키상이 있었고 1년에 1000달러를 벌었는데, 그 돈을 일본인들이 빌려 상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해외의 가라유키상들이 일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글에서도,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 이라고 분명히 강조했고, 이어서 그런 행위가 담고 있던 누군가를 위로하는 역할에 대해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라고 분명히 기술했으며,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쓴 것처럼, '긍지는 어디까지나 자기존재에 대한 긍지일 뿐입니다.

고발자와 대리인과 검찰이 이 부분을 위안부가 '애국자체에 자긍심을 가졌다'고 읽은 것은 문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오독입니다.

2) '동지적 관계' 개념의 의도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는 또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고, '동지적관계'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도 명시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일본을 향해 쓴 부분에서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고 쓰면서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6. 지원단체/검찰/학자의 기만과 망각

이제 이들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세가지 논점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1) 매춘/강제 | 일본인 위안부의 차이화

그런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표였던 윤정옥 교수도, 한겨레에 연재되어 유명한 글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90년, 1월 4일. 일본군위안부 신문기사 자료집, 정대협 연구 보고서, 2004, 45,46쪽. 추가)

이 자료들과, 보고서 머리말에 있는 '조선사회의 빈곤화와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신매매를 볼 수 있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만주로 팔린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는 말은, 지원단체가 일찍부터 위안소형태가 관리매춘이었고 군인에 의한 강제연행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004년, 무려 12년 전 일입니다.

또한 2009년에발간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행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보면 송복섭이라는 조선인 군속의 수첩을 근거로 한, '광주에서 종군위안부 61명의 명단이 확인돼 일제가 한국인 위안부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까지 끌고 가 매춘을 강요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992/1/16, 광주매일)이 기사는 위안부 중에 '세 유부녀까지 포함됐다고 송옹은 증언'했다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얼마만큼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원고측 대리인들과 검찰은 자신들의 무지 혹은 기만을 숨기고,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고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이나 총독부관계자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고만 강조합니다. 그리고 저의 책이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서 저를 엄벌에 처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일본의 연구서뿐 아니라, 한국의 보고서 역시, '위안부나 유흥업 등으로의 충원과정에서 유괴유인, 취업사기, 인신매매등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각종 수법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지적을 하면서 '일본여성들조차 일본 내무성, 외무성이 제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71쪽, 추가참고자료)

원고 대리인 또한, 센다 가코의 〈속 종군위안부〉를 제시하면서, 마찬가지로 조선인 위안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였다고 강조했지만, 같은 책에 '29세의 조선인 창녀'(118쪽)도 등장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들은 조선인위안부를 비하해서 '조센삐'라고 불렀는데, 일본인 위안부에게도 비하의 말인 '삐'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름 아닌 같은 책에 나옵니다(148쪽).

다시 말해 원고대리인은, 국민을 향해 행해 온 오랜 기만을, 재판부를 향해서도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 가처분 및 손해배상 1심재판부는 이러한 자료들을 면밀히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제복을 입은 업자/조선의 '낭자군'

앞서의 공판에서 군복을 입은 업자에 관련한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 자료에 대해 보충설명하겠습니다.

앞서 제출한 증거자료 45호 중에 있는 조선거주 일본인의 회상에는 '金原始彦'이라는 군속이 만주에서 '황군위안부로서 인솔 활약,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후창읍으로 귀국`해 와 있다면서 '한사람이라도 낭자군을 모아 전력증강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패기만만'(증거 45)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시 군속에게는 군복을 닮은 제복이 지급되었으니, 평상시에도 군속제복을 입고 다니던 업자들을 소녀들이 '군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는 '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서의 공판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실제 군인의 강제연행 가능성도 저는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지원단체는 모집정황의 국민과 여론, 그리고 국제사회를 향해 강제연행이라고만 주장해 왔고, 초기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책은 오로지, 그것을 전하고 '다시 논의'하기를 바랬던 책일 뿐입니다.

3) 군속으로서의 위안부

그런데, 저 말고도, 이런 정황에 대해 간파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또, 한 일본군인이 쓴 책은, 중국에 위안부가 8만명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현지사인 오석경씨가 앉아 있고 그 오른 쪽에 내가 있고 10명의 위안부에 둘러싸여 있는데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있지만 전부 조선인'(長嶺秀雄〈戦場〉, 私家版, 昭和62年, 94쪽)인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필리핀 세부도에서 '위안부 약 100명이 특수간호부의 이름으로 군의 야전병원과 행동을 같이 했으며 우리 제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면서, 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부대가 진지 안을 우왕좌왕할때 이 간호부 부대는 의연한 태도로 동요되지 않았다(98쪽)'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정황을 알지 못한 채, 원고측과 검찰과 일부학자들은, 저의 책을 두고 그저 '예외의 일반화'라면서 비난해 왔던 것입니다.

4) 소설 사용에 대해

7.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를 위해서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 역시 오래전부터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 기술한 것은 딱 한 분입니다. 피를 토하듯 한 유서를 써서 인터넷에 올려 두었던 심미자 할머니입니다. 그것도 그 분의 위안부체험이 아니라 지원단체 비판이었고, 아무도 이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문맥에서 언급했습니다.

심지어 많은 분들이 가명을 쓰고 계시니, 설사 어떤 분을 특정하고 싶었다 해도 가능한 구조가 아닙니다.

위안부의 전쟁터 생활과 귀환 혹은 미귀환에 대해서 쓴 제 1 장 마지막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귀기울여야 하는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 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제국의 위안부〉 104쪽)

그런데 어떻게 저의 책이, 살아 돌아온 생존 할머니들을 특정한 책이 된다는 것일까요. 제가 이 책에서 생각해 본 것은, 일본인여성을 포함해, 국가의 무모한 지배욕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개인이었습니다.

8.'할머니의 아픔'은 누가 만들었는가

1) 당사자가 배제된 대리고발

그런데 고발과 기소는 부당하다는 이들에게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말합니다. 할머니가 아파하셨다, '할머니가 '아픔'을 느끼는 한 고발과 기소는 당연하다고. 학자들조차 일부는 그렇게 말합니다. 최근에도 원고 측 대리인은 제가 '그럴싸한 언변'으로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책을 왜곡해 전달해서 할머니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이어서 분노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나눔의 집 할머니 중 일부 분들과 가깝게 교류했고, 그중 한 분인 배춘희 할머니와는 반년에 걸쳐 전화통화도 자주 했습니다. 만난 횟수보다 전화횟수가 많았던 이유는 나눔의 집에서 저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역시 그래서 만남을 조심스러워 하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쭈었더니 할머니는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눈이) 안 보이잖아, 그래서 (직원이)와서 읽어 주었는데 강제동원이 아니고 뭐야.. 그냥 갔다던가.. 하여간, 그렇게 읽어 줬는데도, 들었는데도 잊어 버렸네.' '책에다가 뭐하러 그런 말을 썼어'라고요. (참고자료 156)

듣는 행위가 책에 있어 간접적인 행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도 독자의 숫자만큼 독해가 가능한 것이 한 권의 책입니다. 저 때문에 아파하셨다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아픔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눔의 집 고문변호사 주도로 이루어진 한양대 로스쿨 학생들의 거친 독해와 그것을 그대로 전달한 나눔의 집 관계자들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이번에는 혼자 사시는 어떤 분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분은 유희남 할머니께 들었다면서 노여워하셨고, 그런 책이 아니라는 설명을 드리려 하자, '서울대 교수 다섯 명이 당신책을 나쁘다고 했다'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고자료 157)

저에 대한 고발에서 할머니들은 당사자가 아닙니다.

링크) 저는, 할머니들 중에 2014년 6월, 고발 이전에 저의 책에 대해 알고 있던 분은 안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배춘희 할머니조차, 돌아가실 때까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의 친밀한 교류를 몰랐기 때문일 텐데, 나눔의 집 소장은 배할머니도 생존해 계셨다면 고발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대화록을 보시면, 그런 징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발 후 1년이나 지난 가을 시점이었는데, 그중 한 분인 유희남 할머니는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제 얘기를 들으시고, 조정문제는 안신권 소장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 분,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것조차 모르고 계셨습니다.

너무나 늦었지만, 고발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쓰기 시작한 저의 글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지금도 돌아다니는 '20억 회유설'이 유희남 할머니의 위증이라는 것도 배할머니와의 통화기록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신권 소장이 반복적으로 비난해 온, 사전 허락 없이 할머니들을 찾아오고 찍으려 했다는 NHK문제 역시, 그의 거짓말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안소장과 나누었던 문자를 제출할 수 있습니다. 배할머니는 일본인들과의 대화를 기다리셨던 분이고, 그 기자들은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2) 피를 토하는 목소리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저는 그것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동시에,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돌봄방식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마음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반은 거짓말'(참고자료 77, 16쪽)이라고 했고, 할머니들의 강연료가 지원단체의 건물에 사용되는 일에 불만이면서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느라 상태가 안 좋으신데도 병원에서 나눔의 집으로 강제로 이송당하신 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피를 토하듯 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셨습니다.

그 배경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대화록을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론과 검찰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미 이와 비슷하게 지원단체를 비난한 분이 일찍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제가 〈화해를 위헤서〉에서 위안부론을 쓰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나도록 정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생존해 계신 분만이라도, 진짜 목소리를 들어 드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측 대리인은 최근 제출한 서류에서 '박유하의 해결책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원고 측은, 이미 고발장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저 '다른 목소리'의 확산을 막고자 했던 것이고, 이후의 공방을 통해서도 그들이 구애하는 것은 오로지 이 부분입니다. 일본의 '법적책임'을 반복적으로 주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건 관계자들이 할머니들께 정보를 전하지 않고, 당사자를 배제한 채 자신들이 모든 것을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3)공격을 만드는 의식

이들의 태도는,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건, 원고대리인이 '피해자 목소리'라면서 그의 서면에서 반복해 기술하는 표현들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창녀', '몸을 팔았다.', '갈봇집' 등등의 단어를 인용·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자발적인 매춘부인 일본인 위안부를, 강제로, 혹은 속아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와 동일시했다고 비난합니다.

이른바 '여공'이나 '매춘녀'들이, 죽지 못해 사는 고통 속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고향에 보낸 돈으로 상급학교에 가고 사업할 수 있었던 오빠가, 여동생의 연애에 간섭하고 윽박지르고 때로 폭력과 살인을 마다 하지 않았던 심성들이, 바로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를 죽여 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내면화한 여성들 또한, 우리사회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를 억압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런 존재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고발과 기소로 인해, 또 아무런 확인 없이 보도된 기사들로 인해, 제가 지금도 일본에서 돈을 받아 위안부를 회유하려 한 매국노이고, 그래서 머플러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어지는 인물로서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데도, 저에 대한 비난을 멈추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들 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지식인 간의 생각 차이의 싸움이 법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심지어 그들 자신은 나타나지 않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대리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4) 공격의 목적

재판장님,

하지만 저는 오로지 혼자, 이들이 집단으로 내놓는 모든 공격 글들을 분석하고 반론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 작업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왜곡과 적대와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이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런 근거 없이 저의 책이 위안부를 '왜곡'하기 위해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철저하게', '반복사용'하였다면서 저에게 '악랄' '잔인' '이기적' '악의적'이라는 단어마저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표현이 전형적인 마녀사냥의 수법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자료와 설명으로 저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고 변론해 왔지만, 정말은 이 문제는 책문제조차 아닙니다.

재판장님,

대리인은 저를 비난하면서 저를 방치하면 '제2, 제3의 박유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엄하게 처벌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고 재판부를 협박마저 합니다. 이들이 저를 처벌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잘 이해해 주셨을 줄 믿습니다.

이들의 공격과 고발로 인해 저의 학자 생활 25년의 명예가 한순간에 깨졌고 이 2년 반 동안 고통받아 왔습니다.

아주 극소수만이 저의 책을 올바로 받아들여 주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 왔습니다. 고발 사태로 입은 명예훼손과 상처는 설사 이 재판에서 제가 승소한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부디 명철한 판단을 내리시어 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16년 12월20일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