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사찰, 대선관련소송 압력수단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나지 않던 국정원의 존재가 대법원장 사찰문건 공개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삐죽 튀어나온 셈이다. 총체적 국기문란 사태에서 국정원이 빠지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2014년 1월에 작성된 대법원장 사찰문건은 2012년의 대선댓글개입으로 2013년 내내 검찰수사와 국회특위에 시달렸던 국정원이 2014년에도 여전히 안에서는 딴짓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2014년 2월28일로 끝난 국회특위의 국정원 개혁안이 과연 국정원의 무분별하고 불법적인 국내정보 수집관행을 바로잡았을지 전혀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2016-12-19     국민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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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제 시국특집 22회

글 | 곽노현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

대법원장과 춘천지법원장 사찰문건의 작성주체는 국정원이 확실시된다. 그 문건을 복사한 결과 원본에 없는 "차"자가 문서 한가운데와 좌우상단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복사방지용 워터마크를 숨겨놓은 특수종이를 사용해서 문서원본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워터마크가 국정원 문건의 특징이라는 사실은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유품으로 남긴 국정원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국정원이 청와대에 보고한 "2014년 하반기 국정운영관련 제언" 문건과 "서울시민 관심이슈 관리강화로 민심회복" 문건 복사본에 각각 "다"자와 "가"자가 똑같은 자리에 선명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장 사찰문건은 2012년의 대선댓글개입으로 2013년 내내 검찰수사와 국회특위에 시달렸던 국정원이 2014년에도 여전히 안에서는 딴 짓을 해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찰소식을 접한 대법원은 당장 발끈했다. 대법원장과 춘천지법원장 사찰을 "사법부를 감시, 통제함으로써 정당한 사법권행사를 방해하려는 불순한 발상"이자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실로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고 규정했다. 당연히 "사법권 독립 침해시도 상황에 심각한 우려와 유감을 표명"하며 "책임 있는 관련자들의 명확한 해명"을 강력히 촉구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본인도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대법원 공보관이 전했다. 대법원의 반응은 톤이 약하다. 당장 특검수사와 책임자처벌을 요구해야 할 사안인데 고작 해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이 대법원장과 춘천지법원장만 사찰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고위법관에 대한 국정원의 신상정보 수집활동은 당연히 100% 불법이다. 국정원법에 따르면 국정원이 정당하게 수집할 수 있는 국내정보는 오직 "국내보안정보(방첩, 대공, 대테러, 대정부전복, 국제범죄조직 관련정보)"로 국한된다. 어떤 기준으로 살펴봐도 대법원장의 주말등산여행이나 지법원장의 대법관승진운동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국정원의 법관신상정보 엿보고 엿듣기는 현행법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행위다. 당시의 국정원장과 국내파트 차장, 그리고 담당계선라인은 모두 국정원법 위반과 사생활보호 위반으로 지금에라도 엄하게 사법처리해야 마땅하다.

대선부정의 원죄를 갖고 탄생한 박근혜 정권의 운명은 처음부터 검찰과 법원의 손에 달려있었다.

시민 2천여 명이 뜻을 모아 대법원에 대선무효 확인소송을 제출한 때는 대선 후 2주 만인 2013년1월4일이었다. 열혈시민들은 국정원의 대선댓글활동과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왜곡발표, 51.6%에 맞춰진 개표부정의혹을 제기하며 대선무효를 주장했다. 법에 따르면 대법원은 이때부터 6월 이내, 즉 2013년7월3일까지 선고를 내렸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12년 대선에서 만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심리조차 개시하지 않은 채 뭉개고 있다. 이유인즉 먼저 원세훈, 김용판 형사재판이 끝나야만 대선무효여부를 심리할 수 있다는 것. 김용판에 이어서 원세훈까지 선거법위반혐의에 대해 무죄 판단이 나오면 대선무효소송을 기각하겠다는 뜻이다. 원세훈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사실관계를 더 따져보라며 2심으로 파기환송 한 사실은 선거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주라는 주문과 다르지 않다. 파기환송을 맡은 서울고법 재판부가 1년 반이 지나도록 마냥 꾸물거리는 이유일 것이다.

대법원은 대선무효소송 심리를 김용판과 원세훈 재판 종료시점 이후로 최대한 늦추기로 결정했다.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대법원이 대선무효소송을 최대한 뒤로 미룬 이유는 어차피 대선무효 깜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예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선무효소송의 심리지연 결정을 관련대법관들이 독립적으로 내렸는지, 아니면, 대법원장이나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선무효소송을 김용판과 원세훈 재판 뒤로 돌린다는 방침으로 대법원은 대선무효소송에서 대선무효를 선고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을 뿐 아니라 재판의 전제가 되는 김용판과 원세훈 재판에서 선거법위반혐의로 유죄를 선고할 여지도 스스로 봉쇄했다는 점이다.

대법원이 대선무효소송 심리를 최대한 늦추기로 결정할 때만 하더라도 박근혜 정권의 검찰이 국정원을 세게 밀어붙이며 댓글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수사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렬 수사팀장이 산통을 깼다. 박근혜 정권이 신속하게 개입해서 9월에 물러나게 하지 않았더라면 법원이 봐줄 수 없을 뻔했다. 그나마 김용판의 선거법위반 혐의는 수많은 정황증거 외에 결정적 물증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봐주기가 쉽다. 반면 원세훈의 혐의는 댓글과 트윗으로 워낙 많이 남아있어서 기술적인 이유로 증거능력을 배척하지 않고는 유죄증거로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실관계를 다시 따져보라는 대법원의 숨은 뜻은 증거로 인정할 수 있는 댓글 개수를 최대한 줄이라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죄질이 경미하고 영향력이 미미하므로 선거법위반혐의를 인정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만약에 대법원이 대선무효소송을 심리해서 대선무효를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채동욱과 윤석렬 사태는 박근혜정권의 정당성에 본격적인 의문과 타격을 가한 일대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 탄핵열차가 그때부터 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법원은 대선무효 위험에서 박근혜를 지켜줄 호위무사를 자임하며 재판을 지금까지 미뤄왔으나 박근혜는 이미 탄핵된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대법원이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선무효소송을 판단할 다시없을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받아 사건을 마냥 쥐고 있는 서울고법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사정변경이 있었던 만큼 서울고법의 파기환송심은 대법원의 주문도 자동 변경되었다고 생각하고 하루바삐 원세훈의 선거법위반혐의에 유죄를 확정하고 대법원으로 다시 보내야 한다.

글 | 곽노현

서울의 첫 진보교육감으로 공교육의 새 표준을 만들기 위해 행복한 교육혁명을 추진했다. 그밖에도 삼성3세 무세승계 저지와 재벌개혁, 독립적 국가인권위 설립과 인권증진, 비밀정보기관의 민주적 통제와 과거청산 등의 시대적 요구를 부여잡고 이론적, 실천적으로 씨름해왔다. 그 과정에서 법치주의의 전사이자 징검다리교육감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지금은 (사)징검다리교육공동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에 민주시민성을 충전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