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촛불집회의 '노란 리본'에서 배운 것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한국 젊은이들의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세월호의 기억이 깔려 있는 것 같다. 87년 6월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기억'도 있겠지만,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면 다 같이 세월호 얘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면 "시위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시위보다 대화가 중요하다", "반대할 거면 대안을 내라" 등등 시비를 거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야말로 대화"라고.

2016-12-06     矢部真太

◼ 한국에서 촛불집회에 참가해서

낮부터 계속된 항의집회가 끝난 건 새벽 1시경. 사람들로 가득 찬 광화문광장에는 막차를 놓친 사람들이 추위를 피하려 몸을 움츠려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노란 리본 열쇠고리와 스티커를 받았다. 열쇠고리는 보도사진을 찍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애용해온 카메라에 달았고, 스티커는 iPhone6 뒷면에 붙였다. 일본에서 왔다고 전하자 이러한 말이 돌아왔다.

◼ 항의의 목소리와 희생자 추모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고와 대응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아, 유가족과 많은 시민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이날도 청와대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고 정부의 대응을 규탄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희생자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이나 플래카드를 들고 4.16이 인쇄된 마스크를 쓰거나 스티커를 붙이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 정권이 국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세월호 사고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희생자 유가족이나 시민들은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세월호 추모 천막에는 희생된 학생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누구나 애도의 뜻을 표할 수 있게 천막은 2년 넘게 그곳을 지켜왔다고 한다.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자세를 갖춰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 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에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부디 편안하게 잠드소서" 기도의 말과 함께, 눈앞에 있는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빛을 보면서 목숨을 빼앗긴 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사고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도 다시 떠올랐다.

천막 옆에는 사고 전에 촬영된 단원고 학생들의 기념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고가 나기 1년 전, 입학한 지 얼마 안됐을 때의 사진 속에서 학생들은 제각기 포즈를 취하며 순진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했더니 "가짜 희생자"니 뭐니 하며 유가족을 비방하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당 소속 국회의원도 그들을 비난했다고 한다.

◼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사고 직후, 한국친구들이 페이스북에 노란 리본을 자주 올렸다.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Facebook, Twitter 그리고 Instagram 등에서 '노란 리본'의 이미지가 확산되었고 한류 가수들도 동참했다고 한다. 2년 전엔 그저 인터넷에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직접 가서 보게 된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추모가 계속되고 있다. 시위 현장에서도 그 뜻이 공유되는 것을 직접 봤다. 그런데 나는 일본에 있으면서 그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인식했다.

정부는 사고 직후의 대응을 계속 은폐해 희생자를 배신한 데 대한 분노가 다시금 퍼져 가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회나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커졌을 것이다.

내 질문에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그렇게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불만과 불안이 뒤섞여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로,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안전신화"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고농도 방사성 물질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향을 잃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런 불안을 실토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햇볕이 내리쬐던 지난 8월 21일, 원전반대운동의 성지와도 같았던 통상산업성 앞 "탈원전 텐트"가 강제 철거되었다.

탈원전 텐트는 추모를 위한 공간은 아니었으나 정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오랫동안 없었던 일본에서, 대지진 이후 대규모 반핵운동이 펼쳐졌음을 증명하는 장소였다. 한국의 문맥과 다르긴 하지만 같은 "천막"이라는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떨면서도 거리로 나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게 된 오늘날 일본의 시민사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한국 젊은이들의 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세월호의 기억이 깔려 있는 것 같다. 87년 6월민주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한 "기억"도 있겠지만, 실제로 얘기를 들어보면 다 같이 세월호 얘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시위나 집회에 참여하면 "시위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시위보다 대화가 중요하다", "반대할 거면 대안을 내라" 등등 시비를 거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한국의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야말로 대화"라고.

일본 사회가 한국처럼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동일본대지진 후의 반핵운동에 이어 2015년 여름에, 학생단체 "SEALDs"(Students Emergency Action for Liberal Democracys,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행동)의 멤버 등 수만 명이 연일 국회 앞에 모여 아베정권이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밀어붙이려 했던 안보법안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한 움직임은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일본 국회 앞에서 "민주주의란 무엇이냐"라고 구호를 외쳤던 한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라"라고 한 말이 가리키는 미래사회일 것이라고 통감했다.

◼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세월호 사고에서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일본사회의 병리가 낳은 것이다. 단순한 사건이 아닌데도 일본 방송에서는 "이해하기 쉽게" 권선징악, 혹은 양쪽 당사자만의 문제로 스토리를 재구성하면서 "그들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우리와 그들을 분리시킨다.

"가만히 있으면 존엄은 빼앗겨 버린다. 그러니까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말하는 내 나이 또래 한국 젊은이에게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런 말을 전하고 싶어서 노란 리본을 카메라와 iPhone에 달았다. 추위에 언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열쇠고리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 이 글은 허핑턴포스트 일본판에 게재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