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페미니즘은 불완전하고 매우 느리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2016-12-06     강병진

이제 와서 ‘미녀와 야수’ 같은 영화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건 쉽고 여러 면에서 정당하다. 지금도 어린이들은 25년 전에 나온 이 영화를 보면서 뒤섞인 가치들을 받아들인다. 사회적 맥락은 바뀌었고, 독립적이고 마음의 짐을 지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이 나오는 영화들도 많은데 말인다. 이 영화가 페미니스트 선언문인가? 그건 좀 무리한 주장 같다. 여성에 반하는 프로파간다를 담은 유독한 영화인가? 명확하지 않다.

‘미녀와 야수’였다.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케이스에 든 VHS 테이프 속에 영화가 담겨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영화다. 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89년에 개봉한) ‘인어공주’의 주인공 아리엘을 칭찬했지만 나는 비웃었다. 책을 좋아하고, 머리가 좋고, 침착한 농부 여성이 있는데, 왜 언어 장애자를 자청하면서 남자에게 목을 매는 인어 공주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동네 공공 도서관이었고, (내 할머니가 기꺼이 증언하시겠지만) 나는 고집 세고 자기 주장이 센 아이였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뺏는다거나 내 의견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벨이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소설들로 가득한 높은 책장들이 있는 야수의 서재에 들어갔을 때 내 머리는 핑핑 돌았다. 나는 후에 자라서 ‘책장포르노 bookshelfporn’ 같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게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공주를 위한 변호: 플라스틱 티아라와 동화의 꿈이 강하고 똑똑한 여성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In Defense of the Princess: How Plastic Tiaras and Fairytale Dreams Can Inspire Strong, Smart Women)에서 비슷한 감정을 회상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정말 황홀해 하는 것? 그건 바로 서재다. 야수가 벨에게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이 가득한 서재를 보여줄 때, 내 심장은 벨의 심장과 마찬가지로 뛴다. 그리고 벨의 고향 사람들은 벨이 늘 지식에 목말라하는 것을 놀렸지만, 나는 벨이 꿋꿋이 책벌레로 남았다는 게 정말 좋았다.”

벨을 그저 ‘미녀’ 이상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페미니스트들

영국 애니메이터 리처드 퍼덤과 질 퍼덤이 각색했던 버전은 임원들이 초기 릴 몇 개를 보고 너무 침울하고 어둡다고 판단해 잘렸다. 당시 디즈니 영화 부문 수장이었던 제프리 카첸버그가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자 울버튼은 차분한 프랑스 동화를 노란 옷을 입은 고집불통 여주인공이 나오는 활기찬 뮤지컬로 바꾸었다. 울버튼은 ‘미녀와 야수’의 벨이 1933년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캐서린 헵번이 맡은 역을 참조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2016년 5월에 타임의 일라이저 버먼이 쓴 글이다. 울버튼의 시나리오는 충격적일 정도로 퇴보적인 수정을 겪었다.

‘미녀와 야수’의 스토리 고문이었던 로저 앨러스는 허핑턴 포스트에 케이크 장식에 대한 싸움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내가 참여하기 전 몇 주 동안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가 보낸 이메일이다. 그는 울버튼이 기억하는 수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린다와 스토리 팀 사이의 갈등이 일어난 이유는 린다와 디즈니의 차이에 있다. 린다는 혼자 글을 쓰는 작가로 일했고, 디즈니는 집단적으로 스토리를 만드는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와 모든 시각적 아이디어는 최선을 찾는 과정에서 리뷰와 수정의 대상이 된다. 이야기를 말하기 위한 가장 강렬한 방법을 찾는다.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주가 부엌이나 세탁실 밖에서 만족을 찾는 걸 보여주고 싶은 이상적 욕구조차 신성하지 않다.

‘페미니스트 디즈니’라는 텀블러를 운영하는 마리 로저스가 허프포스트에 보낸 이메일이다. 그러나 ‘미녀와 야수’가 이 프레임에서 조금 벗어났다는 증거도 있다. ‘인어 공주’에 이르기까지 초기 디즈니 영화들이 자주 쓰던 전략은 혐오스럽고 나이가 더 많은 여성 악역과 여주인공을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신데렐라의 사악한 계모 어술러, ‘백설 공주’의 잔인한 왕비,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마녀가 그 예다.

이 버전에는 벨의 여동생 외에도 그들이 미워하는 고모가 나온다. 고모는 당시에는 돈이 많았던 형제 모리스(벨의 아버지)가 가족을 돌보는 것을 도우러 모리스의 집에 들어와서 모리스의 돈을 뜯어낸다. 모리스가 모든 것을 잃자 그녀는 가난해진 모리스와 가족들에게서 더욱더 뻔뻔하게 돈을 짜낸다. 여기서 가스통은 돈이 많고 멋을 부리는 남성이다. 가스통은 벨에게 구애하고, 벨의 고모는 가스통과 벨을 결혼시켜 새로운 돈줄을 만들려 한다.

여성 가족이나 친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로맨스 소설을 읽으며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소녀를 ‘페미니스트의 혁명’으로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디즈니 작가들이 썼던 예전 시나리오의 벨과 비교해 보면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대부분 잠들어 있거나, 언어 장애를 갖고 있거나, 불평없이 집안일에만 몰두하던 디즈니 초기의 여주인공들과는 비교해 볼 필요도 없다. 디즈니의 벨은 전형적인 공주를 날려버린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작은 진보였다. 작은 진보라도 진보다.

울버튼은 타임에 “소녀와 여성들을 예전에 본 적 없는 역할로 묘사하면 젊은 세대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디즈니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만 자던 오로라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모험심 강한 메리다, ‘겨울왕국’의 대담한 엘사로 바로 옮겨갈 수 있었을까? 혹은 투지있고 침착한 여주인공들이 그저 정상일 뿐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기까지는 아리엘, 벨, 뮬란의 정상화가 먼저 필요했을까?

야수에 관한 문제

‘신데렐라가 내 딸을 먹었다: 새로운 소녀다운 소녀 문화의 최전선에서의 전갈’(Cinderella Ate My Daughter: Dispatches From the Front Lines of the New Girlie-Girl Culture)을 쓴 오렌스타인은 벨과 아리엘의 사랑 이야기는 여성들이 파트너를 찾고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좋지 않은 메시지를 소녀들에게 보낸다고 지적한다. 폭력적인 야수가 있는 집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천사 같은 벨의 역할은 “디즈니의 ‘인어 공주’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남성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소녀들에게 알게 모르게 유독한 영향을 준다. 두 가지 모두 아주 불편한 상징주의이.” 로저스는 디즈니가 이 영화에서 이러한 역학을 더욱 키웠다고 지적한다. “원작에서 이야기의 요점은 늘 정중하고 친절한 야수의 행동이 무서운 외모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1959년에 개봉한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 이후 디즈니는 30년 동안 동화 애니메이션 제작을 쉬었다. 디즈니 공주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이 영화들에 대한 이 지적은 스트라이크 원, 투에 해당한다. 로맨스에 대한 이런 유독한 메시지는 보다 야심차고 독립적인 공주를 만들었다는 장점을 상쇄할까?

반면 파인은 벨/야수 관계를 포함하여 이 영화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 로맨스는 납치범과 피해자 사이의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학대가 존재하는 연애를 묘사하는 것인가? “나는 그건 무리한 시각이며 좀 지겹다고 본다.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러브 스토리는 소외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인이 허프포스트에 이메일로 설명했다.

올해 IGN에 “벨이 잡힌 것은 맞지만, 벨은 야수를 뒤바꾼다. 벨은 대상화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애나 E. 얼트먼과 게일 드 보스 등의 평론가들은 반대로 “야수에겐 벨이 볼 것이 없었다. 벨은 자기가 만들어낸 모습을 본 것이다.”고 주장한다.

벨과 야수의 로맨스에 대한 파인의 시각은 팬들로선 안심이 되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보며 자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본능적인 논리다. 그러나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달되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괴상한 사람들이고 아무도 우리를, 우리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라는 건 (십대라면 특히) 자신의 연애에 적용시키고 싶은 매력적인 논리지만, 심각한 문제를 가리기도 한다. (왜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의 남자친구를 불편해할까? 당신과 남자친구는 오직 서로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몽상가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당신의 친구들은 그가 당신을 형편없이 대하는 걸 눈치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시각은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학대 행동을 별 것 아니게 여기게 할 수도 있다. 야수가 처음에 벨에게 충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벨이 “남기로 ‘선택’했기 때문에(벨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혹은 벨이 불만을 표현했기 때문에(그리고 야수는 변했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봐선 안된다”고 로저스는 주장한다.

전에 디즈니에서 일했고, 지금은 파티 회사인 벨라 프린세스에서 벨 등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는 브리트니 리 해밀튼은 전화를 통해 어린 소녀들은 보통 옷과 머리 색깔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로맨스를 따르기 보다는 여주인공에 곧바로 감정이입을 하려 한다고 허프포스트에 전했다. “[벨과 야수가] 연애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한다.” 그러나 러브 스토리를 자세하게 파악하느냐는 물음에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지금 그 영화들을 보면 메시지가 보인다… 외모에 관한 것이고 […]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지가 당신의 삶을 만든다는 것이 보인다. 우리에겐 보이지만 아이들이 그걸 볼 거라고는 난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은 아이들이 공주 영화에서 받게 될지 모를 유해한 메시지들을 막으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다고도 했다. 소녀들은 옷과 화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거나, 왕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게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등의 메시지를 말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이상화되지만 학대하는 관계를 엔터테인먼트에서 보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 엔터테인먼트와 현실의 삶에서 그와 같은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올해 여름에 나온 한 연구에서는 디즈니 공주 영화들이 어린 소녀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연구 대상이 된 소녀들이 공주 문화에 더 깊이 빠져 있을수록, 전형적인 여성적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영화들이 소녀들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 이 연구에서 밝힌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화에서 러브 스토리를 없애기

최근 영화들(심지어 공주가 나오는 것들도)을 보면 로맨스를 없애는 게 디즈니의 전략이 된 것 같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신비한 여정을 겪는 폴리네시아 소녀가 등장하는 최근 영화 ‘모아나’의 리뷰에서 ‘슬레이트’의 아이샤 해리스가 지적한 대로다. “2013년의 ‘겨울 왕국’이 디즈니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파는 방식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해리스의 글이다. 조금 먼저 나온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은 모험심 많은 젊은 공주와 공주와 어머니의 관계를 이야기하며 고전적인 동화 형식을 버렸다. 로맨스가 없는 ‘겨울 왕국’은 안데르센을 떠올리게 했고, 대히트를 쳤다. (‘겨울 왕국’을 보지 않았더라도 ‘렛 잇 고’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완벽한 왕자가 악당으로 변하는 캐릭터이고, 이성애 로맨스보다 자매애를 노골적으로 더 높인 것은 디즈니 동화의 맥락에선 혁명적으로 느껴졌다.” 해리스의 글이다.

울버튼은 EW 인터뷰에서 초기 디즈니 공주 영화들이 ‘문화를 반영한다’고 했다. 벨을 페미니스트적인 주인공으로 만드는 일은 “힘들었다. 여주인공-피해자라는 생각이 디즈니에서는 굳어져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결과물에 만족한다고 말한다. “한 번에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벨 이전의 디즈니 공주들을 보라. 벨은 독립적이고 개방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독서하기, 야외 탐험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걸 만드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벨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다 전쟁이었다.”

조금씩 이뤄지는 진전

이러한 점진주의적 접근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다. 최근의 선거가 그 사실을 보여준 바 있다. 25년 동안의 변화는 불충분한 타협으로 보인다. 왜 즉각 모든 걸 바꾸라고 싸우지 않는가? 아니면 디즈니 공주 브랜드 기계 자체를 내다버리고 페미니스트 아이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유토피아를 다른 곳에 세우는 건? 진보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긴 해도, 지긋지긋한 한 걸음 전진-두 걸음 후퇴를 반복할 수도 있다. 최근에 묘사된 벨의 모습은 지성보다는 미모를 강조했다고 오렌스타인은 주장한다. 2012년에 디즈니가 다시 선보인 미녀와 야수에서는 “벨의 외모는 솔직 담백함에서 경박함으로, 고결함에서 섹시함으로 갔다”고 그녀는 썼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버전의 벨과 2012년의 벨

로저스는 문제가 많았던 애니메이션 원작을 실사 영화가 크게 개선하기를 바란다. 만약 벨이 여행과 소설 이외의 다른 것에도 흥미를 보인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가 발명가라는 사실(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이 흥미롭다. 벨이 이런 관심을 가진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로저스가 허프포스트에 말했다.

11월에 캐릭터에 대해 단서를 흘렸다. “그렇다. 우리는 벨을 발명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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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판 ‘미녀와 야수'의 새로운 스틸들이 공개됐다

 

허핑턴포스트US의 Coming To Terms With ‘Beauty And The Beast’ And The Imperfect Feminism Of Disne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