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회고록] 18.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MB정부는 촛불사태 이후 국민통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촛불사태를 겪고 난 뒤 저 사람들은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 핵심이 노사모이고 친노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본질적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YS나 DJ는 상대방의 비자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수세에 몰리니까 상대방을 치기 위해 비자금 영역을 건드렸다. 그것을 기획한 인물이 B청장이다.

2016-11-29     정두언
ⓒ연합뉴스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뒤늦은 당선 축하금

그날 C씨는 내게 대략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정신 차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헤맨 이유가 당선 축하금을 안 받아서 그렇다. 당선 축하금을 받아 뿌렸어야 이런 일이 있어도 지지자들이 총대 메고 나서서 적극적으로 수습을 하는데, 통치자금을 안 걷고 안 뿌렸더니 불만이 많다. 인사에 소외당한 사람들을 돈으로라도 무마를 했어야 했다. 이런 불만이 누적돼서 촛불 사태를 막지 못하고 곤욕을 치렀다."라는 것이다. 나는 C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 축하금이라니!' 사안을 보는 인식이 너무 군사정권 식이었다. 조찬을 마치고 헤어지면서 그 분은 "차에 뭘 좀 실었다"고 말했다. 나는 추석도 다가오고 하니 과일 상자를 실었나 보다 생각했다. 의원회관으로 돌아와 트렁크에서 박스를 내리며 확인해보니 과일상자가 아니고 현금 상자였다. 현금 2천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돈을 모두 돌려보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정태근, 김용태도 액수는 나보다 작지만 그분으로부터 돈봉투를 받았는데 돌려보냈다고 들었다.

노무현 서거를 불러온 권력내부의 음모

정두언 : 청장님,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정두언 : 그 XX가 누군데요?

B청장이 얘기한 인물은 A청장이었다. 권력기관장 교체설이 나오니 A청장은 박연차를 잡으면 노무현을 잡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박연차가 회장으로 있는 태광실업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선제 대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실마리가 나오니 대통령한테 일정을 잡아달라고 해서 단독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한다. '조사를 대강 해봤더니 노무현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B청장도 나왔다'는 식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밝혀지기 전에 B청장을 미리 사퇴시켜야 하니 '빨리 사표 내!' 이렇게 흘러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군사독재정부 이후에 두 번의 권력 교체가 있었다. 야권으로 권력이 넘어갔다가 다시 여권으로 넘어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은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밟고, 탄압해야 한다는 기조로 바뀌었다. 선거 때는 국민 통합을 내걸었지만 집권 하면 싹 잊어버렸다. MB 정부도 촛불 사태 이후 국민 통합이 아니라 상대방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갔다. 촛불사태를 겪고 난 뒤 저 사람들은 화해할 수 없는 세력이다, 그 핵심이 노사모이고 친노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본질적으로 대통령 비자금의 영역을 건드린 것이다. YS나 DJ는 상대방의 비자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MB 정부는 수세에 몰리니까 상대방을 치기 위해 비자금 영역을 건드렸다. 그것을 기획한 인물이 B청장이다. 그가 그렇게 기획을 했더라도 적어도 대통령이나 민정수석, 정무수석, 비서실장 정도는 이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판단을 해야 하는데, MB정부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소위 권력과 자금의 관계가 국정운영에 어느 정도 비중이 있고, 이것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추부길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제정신인가 생각했다. 그 시점에서 박연차를 살려달라는 로비가 통하겠는가. 돌이켜보면 자신이 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박연차로부터 자기 얘기가 안 나와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기가 뭔가 하고 있다, 그를 위해 뛰고 있다는 것을 박연차에게 보여줘야 했던 것 같다.

2009년 5월 서울 경복궁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부인 김윤옥씨가 헌화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 AP 연합

쇄신정국으로 노무현 서거 파고를 넘다

나와 정병국, 권영세, 주호영, 원희룡, 남경필, 정태근, 김용태 등이 모였다. '박희태 사퇴'에 공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실천에 옮기자"며 박희태 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김효재에게 전화를 했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즉시 당 대표실로 갔다. 대표실에 도착했을 때 정병국, 주호영은 보이지 않았다. 권영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표님! 빠른 시일 내에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얘기를 듣는 박희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시 송태영과 속리산 법주사에 있었다. 주지 스님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법주사로 내려가기 전 나는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청와대는 노무현 서거 정국을 뒤집으려고 개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형준은 내게 "입각이 될 것 같으니 (쇄신 서명을 하는데) 이번에는 빠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했다. 법주사에 있는데 김용태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2시에 기자실 가는데 형 이름 올려? 말어?" 하고 물었다. 차마 '나 이번에 입각하니까 빼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올려!' 하고 끊으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두언, 너 후회하면 안 돼!'

나도 김용태가 오만과 독선 성명서를 내기 전날 맹형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을 만났다. 나는 맹형규를 만나기 전에 성명서 초안을 미리 보냈다. 사전에 대통령에게 보고를 해달라는 뜻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김용태 등이 성명을 발표하더라도 그 진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사전에 맹수석에게 내용을 알려준 것이다. 맹형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당에서 총대를 메려고 하는 것이다. 분위기를 만들어 줄 테니 청와대도 쇄신으로 정국을 전환하라"라고 설득했다. 그러자 맹형규는 "알았다. 그렇게 해보시라"고 했다. 나는 당시 맹형규가 대통령에게 사전에 보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맹형규가 동의를 한 것으로 보아 대통령도 양해했구나 생각했다. 당시 맹형규의 속셈이 무엇이었을까.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13. 한반도 대운하의 포기, 4대강 살리기로의 전환

14. 제18대 총선 한나라당 공천 작업의 내막

15. MB정부 인사실패의 교훈

16. MB정부 민간인 사찰의 겉과 속

17. 권력사유화 파동의 전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