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결정'과 경제학의 실패

세상은 분명 과거보다 발전하고 소득과 생활의 수준도 과거보다 나아졌다지만 정작 이들은 그것을 체감할 수 없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번영의 이야기는 이들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데이터와 부는 결국 엘리트의 것이었으며 자신들은 이 시스템에서 소외되었음을 깨닫는다. 무직자에게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사실과는 다르다 해도 양질의 일자리를 잃고 저급 일자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에겐 더 저렴한 가격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외국인의 존재란 이미 닥친 위기에서 생존을 걱정하게 만드는 위협이다. 그렇게 굴러떨어지고 번영에서 한 발짝 떨어진 사람들에게 평등과 올바름은 더 이상 최우선 순위에 있지 않다.

2016-11-11     김영준
ⓒASSOCIATED PRESS

경제학은 사람들에게 자유무역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것 같다.

자유무역으로 인해 세계는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주고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혁신과 생산성의 향상을 이루어냄으로서 전보다 좀 더 부유한 세계가 되었다. 자유무역이 세계 경제에 기여한 바는 이처럼 거대하다.

세상은 분명 과거보다 발전하고 나아졌다지만 정작 이들은 그것을 체감할 수 없었다.

반면에 중부지역의 노동자들은 오래 동안 일해온 자신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일자리는 사라졌어도 부양을 해야할 가족은 여전히 있기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재교육을 통해 테크 기업과 금융 기업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들에게는 과거보다 낮은 품질의 일자리가 주어진다. 고용은 과거보다 불안정해졌으며 소득 또한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같은 시간을 일해도 과거와 같은 임금은 받을 수 없다.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하고자 해도 그 자리 또한 충분치 않았다.

무직자에게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이 지난 6월에 영국에서 동일하게 발생한 것을 보았다. 쇠락한 산업과 그 산업이 중심이던 지역과 그 지역의 사람들이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혐오를 용인하고 혐오를 표출하며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을 보았다. 이것을 그저 '어리석은 결정'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인가?

2016 미국 대선과 브렉시트에서 보듯이 불평등과 일자리 양극화는 절반의 사람들이 인권을 잠시 도외시하고 혐오를 용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더 이상 1:99의 문제가 아니다. 브렉시트와 어제의 대선에서 볼 수 있듯이 50:50의 문제다. 진정한 불평등은 선거 지형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연령과 학력차, 거기에 성별이라는 좀 더 가까운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자유무역에 대해 분노하는 50%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그것이 혐오를 용인해버린, 뒤로 후퇴한 사회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방법이다.

* 이 글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