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 쿠데타' 진실의 청문회를 열자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나는 지난 토요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었다. 교복 입은 중고생 수백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에 나섰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저희가 배운 민주주의는 어디 갔습니까' '아버지는 6월 항쟁, 딸은 시국선언'.
아이들 옆에 서 있던 나는 부끄러웠다. 그 앳된 목소리들에 내민 게 겨우 채증과 사법처리라니. 이러고도 우린 아이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부가 멈춰 선 건 뉴스(news)가 아니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종로3가역에서 선도 트럭이 우회전해 을지로로 향했다. "박근혜가 몸통이다." "새누리도 공범이다." "기업들도 공범이다." 올 초부터 이어진 정운호→홍만표→진경준→우병우→최순실의 '나비효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해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검찰권력이 짝짓기하는 말기적 증상 속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시민들을 주권자의 자리에서 하야시킨 무혈(無血) 쿠데타가 가능했다. 그 물증이 미르·K스포츠재단이고, 최씨 딸 정유라의 대학 합격증이고, 우병우의 기고만장한 사진이다.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들이 진실을 말할 때 박수로 고무하고, 진실을 회피할 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하자. 그 과정을 통해 '이러려고 검사가 됐나'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뼈아픈 자성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자성 위에서 우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