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 쿠데타' 진실의 청문회를 열자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들이 놀랄 만큼 잘 돌아간 데 있었다.

2016-11-09     권석천
ⓒ연합뉴스

나는 지난 토요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 있었다. 교복 입은 중고생 수백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에 나섰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저희가 배운 민주주의는 어디 갔습니까' '아버지는 6월 항쟁, 딸은 시국선언'.

아이들 옆에 서 있던 나는 부끄러웠다. 그 앳된 목소리들에 내민 게 겨우 채증과 사법처리라니. 이러고도 우린 아이들에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부가 멈춰 선 건 뉴스(news)가 아니다. 최순실 의혹에 대한 고발이 접수됐지만 검찰은 한 달간 꿈쩍하지 않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인허가 과정을 감사해야 할 감사원도, 최씨 일가 탈세 의혹을 조사해야 할 국세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나라냐"는 물음은 대통령과 최씨뿐 아니라 국가기관 모두를 향하고 있다.

종로3가역에서 선도 트럭이 우회전해 을지로로 향했다. "박근혜가 몸통이다." "새누리도 공범이다." "기업들도 공범이다." 올 초부터 이어진 정운호→홍만표→진경준→우병우→최순실의 '나비효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해 갈 데까지 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검찰권력이 짝짓기하는 말기적 증상 속에서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시민들을 주권자의 자리에서 하야시킨 무혈(無血) 쿠데타가 가능했다. 그 물증이 미르·K스포츠재단이고, 최씨 딸 정유라의 대학 합격증이고, 우병우의 기고만장한 사진이다.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그들이 진실을 말할 때 박수로 고무하고, 진실을 회피할 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징치하자. 그 과정을 통해 '이러려고 검사가 됐나'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뼈아픈 자성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자성 위에서 우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