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아래로부터 채워지는 것

문제의 해결은 정확히 그 반대방향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되어도 살 만할 때만 정규직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실업자가 된다 한들 버텨낼 만해야 비정규직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누구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진술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지에도 '낙수효과'란 없으며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나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만하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해소하는 궁극의 방법이며 삶의 연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2015-03-06     황정아
ⓒShutterstock / pixbox77

이 조사를 두고 청년층이 겪는 좌절감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극단적 성향 같은 것에 주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들 다수가 나날이 감당하는 삶의 고단함과 막막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고 그들이 다름 아닌 '청년'이기에 그 같은 삶의 속박에 남달리 예민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사결과가 전하는 바는 무엇보다 한국사회의 전체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며 거기에는 '땜질'식 변화, 더 정확히 말해 이미 가진 것은 고스란히 보존한 채 땜질로 변화를 대신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붕괴에 방불한 근본적인 변화, 그런 것이 아니고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다.

이제야말로 우리 삶의 균열을 돌볼 때

물론 그보다 엄중한 사실은 이제 청년층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 코스프레나 땜질식 변화나 그리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실상 지지율이 콘크리트든 아니든 그건 대통령 본인이나 신경 쓸 사안이고 우리 다수에게 시급한 것은 그분이 별로 염려하지 않는 우리 공동의 삶에 깊어진 균열을 돌보는 일이다. 앞서의 설문조사에서 붕괴와 함께 묶인 새로운 시작이란 '더 나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겠지만 현실에서는 붕괴가 '더 나쁜' 시작과 묶이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애초에 한 사회의 붕괴 자체가 결코 그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같은 정도의 붕괴일 리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작용하리라 믿기 쉬운 자연재해나 기후변화의 피해마저 지역과 계층과 성별에서 비롯된 사회적 차이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른 것을 보면, '같이 망한다'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불가능한 선택인 셈이다.

희망이란 위를 보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해결은 정확히 그 반대방향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되어도 살 만할 때만 정규직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실업자가 된다 한들 버텨낼 만해야 비정규직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누구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진술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지에도 '낙수효과'란 없으며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나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만하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해소하는 궁극의 방법이며 삶의 연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