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회고록] 12. 남북관계를 절단 낸 비밀 접촉

그 동안 전임 정부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대북 라인 가운데는 살려야 할 라인, 죽여야 할 라인 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단점을 검토하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시각에서 대처했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대북라인이 무너졌다. 대북 라인에 종사했던 귀중한 자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다. 통일 문제, 대북 문제, 남북 협력 문제 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인적 자산들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후 MB 정부의 대북정책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MB 대통령의 취임식에 북측에서 온 특사가 참석했다면 MB 정부 5년의 남북관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2016-11-01     정두언

[최고의 정치, 최악의 정치 - 정권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연재의 다른 글은 정 전 의원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블로그 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MB 취임식 참석 시도

2007년 12월 말 내가 배석한 상태에서 창성동 별관에서 MB에게 북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MB는 당시에 그의 보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추후 다시 논의해보자는 반응이었다. 이 이후 남성욱 교수가 "북한 특사로는 부총리급 이상이 와야 한다"고 말한 것이 2008년 1월 1일이고, "인수위에서 MD(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 체계) 참여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1월 11일이다. 북한이 처음부터 취임식에 올 생각이 없기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제스처를 취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참석하고 싶었는데 MD문제 등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들이 불거지고 김만복 원장의 비밀 방북이 공개되면서 참석을 안 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당시 북한 내부에서도 MB 정권의 등장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라인이 움직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인하여 남북 간의 핫라인이 중단되었다.

인수위 시절 북측의 MB 취임식 참석 제안은 노무현 정부 시절의 남북관계 기조를 MB 정부에서도 이어가자는 북측 나름의 기대가 반영됐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의 취임식 참석이 성사되지 못했던 것과 관련해 통일부 쪽에서는 다른 얘기도 있었다. 북측이 "대선을 잘 치르게 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을 넣어 서신으로 초청을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MB에게 보고가 되어 "그것이 무슨 소리냐, 못 넣는다"라고 해서 무산되었다는 얘기다. 이 얘기가 맞다면 북한에서는 겉으로 어떤 모양을 취했건 애초부터 특사로 올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도 된다.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남북 간 핫라인의 단절

그 동안 전임 정부들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대북 라인 가운데는 살려야 할 라인, 죽여야 할 라인 등이 있었을 것이다. 장단점을 검토하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시각에서 대처했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도 없이 한순간에 대북라인이 무너졌다. 대북 라인에 종사했던 귀중한 자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다. 통일 문제, 대북 문제, 남북 협력 문제 등을 도모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인적 자산들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이후 MB 정부의 대북정책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MB 대통령의 취임식에 북측에서 온 특사가 참석했다면 MB 정부 5년의 남북관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국제 및 남북관계의 아마추어리즘

MB는 이런 문제의 엄중함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 죄송한 얘기지만 외교에서는 여느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였다. 어느 나라나 외교 문제의 큰 흐름은 여야가 바뀌어도 항상 그대로 간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지금까지의 흐름에 바탕을 두고 본인의 관점을 얹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무시한다. MB도 예외가 아니었다. MB는 대통령이 된 뒤 이전까지의 '정무적 판단'을 공유하던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뭐 알아?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서 '외교안보와 같은 문제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얘기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상득 라인이 득세하면서 소위 대통령이 생각해야 할 '정치'나 '정무적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팀워크가 완전히 와해됐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정무적인 판단까지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역대 정부에서는 대북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큰 그림을 그리고 관료사회는 거기에 방향을 맞춰서 일을 추진한다. 그런데 MB정부나 현 정부는 대북 문제의 디자이너가 없다. 실무관료들 자체가 큰 그림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누가 뭘 얘기하면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식으로 간다.

2009년 10월 원세훈 국정원장이 국정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 국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김숙 1차장과 김주성 기조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국정원의 사유화

그 중에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장다사로 민정비서관이었다. 민정비서관의 중요 역할 중 하나가 친인척 관리이다. 친인척 중에 제일 요주의 친인척이 이상득인데, 그 관리를 이상득의 직전 비서실장이 하면 되겠나. MB의 묵인 하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서 김주성이 국정원에 들어가게 됐다. 그 김주성을 통해 소위 원로그룹이 국정원 인사를 좌지우지 하게 됐다. MB 정부 초기에 청와대에 파견된 국정원 인사 가운데 최시중이 나온 대구 모 고고 출신이 6~7명이나 됐다. 그 정도로 무리한 인사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MB 정권 초기 국정원은 내부 갈등이 심했다. 특히 김성호 원장과 김주성 기조실장의 알력이 심했다. 서로 정치적인 라인이 달랐기 때문이다. 기조실장을 내세워 국정원을 장악하려는 이상득계의 '도발'이 근본 원인이었다. 특정고 출신이 7명 가까이 청와대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김주성이 인사를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파견된 직원인 L직원이 김성호를 사찰하기도 했다. 부하 직원이 자기의 최고 상사인 원장을 사찰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 때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성호는 고려대를 나온 인연으로 MB 정권 들어 국정원장을 맡은 것 같다. 한때 이종찬 변호사가 유력하게 올랐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막판에 김성호로 바뀌었다. 역대 정권이 거의 다 그랬듯이 비공식 권력이 실권을 장악하면 대체로 권력기관장을 핫바지로 앉힌다. 나중에는 김성호도 나름대로 원장의 권한을 행사하려다 결국은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 모두가 알다시피 서울시에서 상수도사업본부 본부장을 하다 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원세훈이 국정원장으로 왔다.

시급한 대북라인의 복원

급작스럽게 대북라인을 복원해야 할 때는 재량권이 있는 사람이 키맨이 되어야 한다. 북한에서 볼 때 이 사람에게 본인들 요구사항, 협상을 하는 재량권이 있다고 판단되면 확 달라붙는다. 과거 노태우 정부 때의 박철언이 대표적인 경우다. 또 한 사례로 박지원이 북한에 비밀 접촉하러 갔을 때 그는 정상회담을 받기 위해 북한의 얘기를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국정원 대북파트 인사들이 미리 브리핑을 했다. 북측이 이렇게 나올 것이고 그러면 이렇게 답하라는 식이었다. 박지원이 한마디 던지니까 북측은 국정원이 예상한 대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가 가져간 선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하여튼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이렇게 재량권이 있는 사람이든가, 옆에 그 분야에 오래 종사해서 저쪽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개혁은커녕 정상화가 시급한 국정원

<글 싣는 순서>

연재를 시작하며 |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라에서

1. 위기의 시절을 보내던 MB는 어떻게 서울시장이 되었나

2.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청계천 복원에 협조하게 되었나

3. '좌파정책'인 대중교통개혁의 성공

4. MB 캠프의 태동

5. 안국포럼과 경선캠프의 실상

6.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이런 사람은 안 된다" 기자회견

7. 대선승부의 최대 걸림돌 'BBK 사건'

8. 왜 모든 정권은 비슷한 몰락 과정을 거치는가

9. 대선캠프의 변질

10. 백해무익한 정권 인수위

11. 인수위 시절의 어두운 비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