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이 보내온 질문

어떻든 우리 시대가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실제에서 음유시인을 갖고 있었고, 그로부터 깊은 위로를 얻어왔다는 노벨위원회의 소식은 놀랍고도 반갑다. 모든 상이 그러하듯 문학상도 축제와 자기 격려의 한 방식이다. 노벨문학상이 발견한 축제의 음률은 적어도 최근 "세상에서 생각된" 최선의 것인 듯하다. 밥 딜런은 웅얼거리고 속삭인다. 생각해보면, 웅얼거림과 속삭임은 문학에 대한 오래된 정의 중 하나이다.

2016-10-20     정홍수
ⓒASSOCIATED PRESS

삼중당 문고와 나

그 무렵과 80년대 초중반 대학 시절을 일종의 정신적 형성기로 잡는다면, 적어도 나의 개인적·세대적 경험 안에서 영향의 진원지를 헤아려보는 건 가능할 것도 같다. 초점을 문학으로 좁혀보면, 삼중당 문고 중에서도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꼽힐 것 같고 이어진 '동서그레이트북스' 시절로는 도스또옙스끼가 유력해 보인다. 그러니 외국문학이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부터 『현대문학』을 접하게 되면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조세희, 황석영, 이문열 등의 작품에도 빠지게 되지만 '문학'이라는 개념과 정의의 모델로 가장 강력하게 자리잡은 것은 아무래도 앞서의 외국문학 작품들이었던 듯하다.

물론 이후 이런저런 계기를 거치면서 내 얄팍하고 미숙한 문학관은 숱하게 수정되고 요동쳤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업이 늘 문학하는 동네 쪽과 연결되면서 문학에 대한 생각을 아주 놓아버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간 세상의 변화와 함께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도 많이 축소되었고, 이즈음으로 말하자면 '한국문학'을 둘러싼 냉기도 만만찮은 듯하다. 그렇긴 해도 가령, "세상에서 생각되고 말해진 최선의 것"(매슈 아놀드)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 문학작품의 특별한 기여가 있다는 생각 정도는 여전히 붙들고 있다. 그 '최선의 것'이 왜 꼭 '문학'만의 것이겠는가마는. 다만 문학은 그 이름과 정의(定義)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역설을 통해서, 문학의 재정의를 향한 모험과 물음 속에서 스스로를 갱신함으로써만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는(혹은 남아 있다는) 점은 기억해둘 만하지 않을까.

음유시인이라는 질문

어떻든 우리 시대가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실제에서 음유시인을 갖고 있었고, 그로부터 깊은 위로를 얻어왔다는 노벨위원회의 소식은 놀랍고도 반갑다. 모든 상이 그러하듯 문학상도 축제와 자기 격려의 한 방식이다. 노벨문학상이 발견한 축제의 음률은 적어도 최근 "세상에서 생각된" 최선의 것인 듯하다. 이런 대목은 정말 좋지 않은가. "Yes,'n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 pretending he just doesn't see?" (얼마나 여러번 고개를 돌려 / 마치 못 본 듯 외면할 수 있을까,「 Blowin' In The Wind」 중) 밥 딜런은 웅얼거리고 속삭인다. 생각해보면, 웅얼거림과 속삭임은 문학에 대한 오래된 정의 중 하나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