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문단 그리고 여성혐오

'여성혐오'의 원어인 misoginy는 여성을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남성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모든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더 원래의 의미에 가깝다. 그럴 경우 문자 그대로의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여성 보호, 여성 존중, 여성 애착 등 겉보기에는 매우 여성친화적으로 보이는 태도들 역시 차별적인 젠더역할을 고정화시켜 남성지배의 구조를 영속화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미소지니'이고, 황수현 기자는 이런 맥락에서 류근 시인의 시들 역시 '여성혐오'의 반열에 위치지은 것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에서는 또한 매우 상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2016-09-18     김명인
ⓒ한겨레

'죄라고는 사랑한 죄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의 서사 밑엔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 그는 세계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한탄하지만, 여성을 착취하는 세계의 메커니즘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한국문단과 여혐, 한국일보, 2016.9.16.)

사실관계를 말하자면 류근 시인은 자신의 말대로 노골적 기사 청탁을 한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그냥 그 신문사의 아는 기자에게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꼭 실어달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류근 시인을 모르지만 그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종종 접하면서 그가 그런 식의 압력을 행사하는 종류의 시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황수현 기자 역시 그것을 직접 청탁을 받았다고 쓰지도 않았고 또 그 스스로 심각한 압력으로 생각한 흔적도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문제라면 그 "왜 내 시집 기사 안 써줘요?"라는 제목이 문제인데 칼럼 등 기사 외의 신문사 내외의 기고물에 제목을 정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편집부의 소관이다.

나는 황수현 기자의 칼럼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성을 전제로 하는 기사도 아니고 칼럼인 바에, 그것도 본인이 작성했다고 보기 힘든 선정적인 제목 외엔 특별히 예에 어긋난 점도 없다. 황기자는 그 시인의 실명을 밝힌 것도 아니고, 일반 독자라면 그 시인이 누구인가를 추단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평가 역시 나름 신중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언뜻 세계와 불화하는 듯도 하다. 가진 자와 성공한 자들에 비해 처량하고 궁상맞은 자신의 신세를 노래한다."라든가, "죄라고는 사랑한 죄 밖에 없는, 가난하고 불쌍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낭만적인 나"라든가 하는 부분은 기자가 류시인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생각이 있었다면 쓰지 않았을 부분이다.

두 번째로, 아마도 류근 시인에게는 가장 억울한 부분일 테지만, 자신이 기자의 "개인적 지레짐작만으로 여혐에 대한 총알받이"가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 나도 류근 시인의 시들을 면밀히 다시 읽지는 않은 상태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에 황 기자가 말한 대로 "늘 여자가 방석처럼 깔려 있다"는 혐의를 받을 만한 부분은 적지 않다. 그것은 그가 노골적으로 여성을 '혐오'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늘 여성에 대한, 혹은 여성으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하고 여성에게 매우 친근한 경사를 지니고 있는 시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황수현 기자는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시에 "여성이 방석처럼 깔려있다"고 본 것이다.

따로 언급하겠지만, 나는 문인도 먼저 시민이어야 한다는 취지의 비평가 오길영 선생의 말에는 약간의 이견을 가지고 있다. 문인도 시민일 뿐이라면 역설적으로 언필칭 시민사회에 가득한 미소지니를 비롯한 온갖 불의와 행악에서 문인만 유독 빠져나와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문인은 늘 바깥을, 너머를 꿈꾸고 말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격렬한 자기 성찰과 자기 극복이 요구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