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드로잉 | 계획에 없던 한 기록광의 일기 공개

드로잉은 작가적 신뢰와 진정성을 가늠할 때 외부인이 의존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한 작가가 쌓아올린 드로잉 선집은 완성도 여부를 떠나 작가적 신뢰에 대한 증거처럼 믿어진다. 내가 주목한 건 그가 쌓아온 드로잉의 분량이 아니라 제작일을 기록하고 과거사를 보관하는 태도였다. 이쯤 되자, '흠.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록편집증. 전적으로 제3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써나간 기록일 텐데, 그럼에도 언젠가 공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성격의 자료다.

2016-08-25     반이정

(2016.0823~1002 아르코미술관)

<오사카 자화상> 29.3X20.3cm, 종이 위 연필, 2014

서용선 질감

대표작 1순위에 세울 수 있는 단종 시리즈가 1986년 착수되긴 했어도, 동일한 주제로 그린 여러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같은 작가의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시기별로 묘사력에 큰 차이를 보인다. 주제는 같아도 질감이 달라진 거다. 이 때문에 서용선 브랜드는 1990년 전후로 형성된 걸로 봐도 될 거 같다. 원색과 굵고 거친 검정 테두리가 지배하는 질감, 그것이 서용선 브랜드다. 지난 자료를 보면 그가 대학(원) 시절을 보낸 1980년대까지 화단을 지배한 단색조 회화의 도그마에서 헤어나려고, 지금의 화풍을 도입한 듯하다. 그 때문에 서용선 브랜드는 신표현주의로도 흔히 칭해졌다. 간단히 정리하면 한국 형식주의 모더니즘에의 반감이되, 실추된 형상과 내용을 반인습적인 방법으로 회복시키려는 시도로 보면 될 거다. 인습적인 형상회화란 그가 2008년 미술잡지 <아트 인 컬처> 인터뷰에서 "고전미술의 사실적인 작품을 보면 우선은 답답하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요. 오히려 관습적인 테크닉으로 보이니까요."라고 답변한 바 있다. 형상회화의 9할 이상을 차지할 인습적인 기교의 대안으로 그는 회화의 기본요소인 선과 색을 본 것 같다. 선과 색이 강조된 서용선 작품이 신표현주의로 명명되는 건 그 점에서 자연스럽다. 어쩌면 서구에서 출발한 원조 신표현주의의 발단도 회화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회화의 기본 요소인 선과 색의 자유분방한 사용을 대안으로 궁리한 데 있을 게다.

<마고입체작품 제작계획도> 37x26cm, 펜, 종이, 2009

드로잉 일반론

그림에 문자를 넣어 해설조의 작품으로 변한 드로잉도 있고, 만화처럼 익살맞게 구성된 드로잉도 많다. 드로잉을 위한 백지 스케치북이 아닌 기성 인쇄물 위에 가필해서 자기 작품으로 전환시킨 것도 많다. 신문지나 광고 전단 위에 가필이나 덧붙임을 올린 주재환의 작품은 광의의 드로잉으로 간주된다. 남의 전시회 홍보 엽서에 장난처럼 가필을 한 김태헌의 재치나, 신문에 인쇄된 증권 객장의 주가변동 그래프 사진의 일부를 지워 흡사 '산수화'처럼 보이게 만든 김학량의 '발견된 미술'도 있다. 이 경우 기성 자료 위에 덧칠을 해서 자기 작품으로 바꾼 셈이니 평면 레디메이드라 칭할 수도 있겠다. 대상의 원래 용도를 버리고 다른 용도를 기입한 미적 전용인 점에서 말이다.

휴대 가능한 2차원 종이작업이야말로 드로잉을 둘러싼 가장 완고한 강박일 게다. 이 강박을 파괴한 드로잉이 새천년 이후 쏟아지면서 이제 입체 드로잉을 만나는 건 놀랄 일도 아니게 됐다. 임자혁은 대학원 재학시절 그녀가 다니던 학교 중앙도서관 벽면에 마스킹 테이프를 거칠게 부착해서 독서하는 학생의 모습을 독창적으로 잡아낸 일회적 설치 드로잉을 시도했다. 홍명섭은 돌 위에 물로 水를 그려 넣거나, 토끼똥을 모아 반전 마크를 땅바닥에 그리기도 했는데,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물은 증발하고 토끼똥은 허물어질 테지만, 이 일회적 유희의 의미까지 사라지진 않는다. 이게 확장된 드로잉의 현주소다.

<붓다> 38X27cm, 전단지 위 아크릴릭, 2015

<화해> 30.5X55.8cm, 신문지 위 아크릴릭, 2012

서용선 드로잉

(2015)는 와카야마에 머물 당시에 계획에 없이 그린 것일 게다. 같은 이치로 '뉴욕포스트'를 펼친 면 위에 그린 <화해>(2012)는 뉴욕에 머물 당시 그린 것 같다. 기성 인쇄물에 간섭한 이런 드로잉을 제3자가 온전히 몰입하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작업은 기성 인쇄물의 문맥을 교란시키거나 풍자하려 했던 김태헌이나 김학량의 의도와는 다른데 있는 것 같아서다. <붓다>와 <화해>가 백지의 스케치북이 아닌 현지의 인쇄물에 완성된 건, 계획에 없이 이뤄졌기 때문이리라. 현장의 호흡을 기록하고 전달할 목적에서 현장에 있던 인쇄물을 바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 호흡의 질감을 환기할 수 있는 이는 그 작품을 바라볼 그 누구도 아닌, 현장에 있었던 작가다.

<장욱진 화실을 다녀온날 쓴 서용선 일기> 1968.1013

서용선 스케치북 (오사카), Sketchbook (Osaka)

와 < 서용선 드로잉 : 1983-1986 >이라는 제목의 드로잉집의 전체 지면은 700쪽이 넘는다. 연도가 적힌 제목처럼 그가 미대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교수로 임용된 해까지의 드로잉을 묶은 것이다. 드로잉은 작가적 신뢰와 진정성을 가늠할 때 외부인이 의존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한 작가가 쌓아올린 드로잉 선집은 완성도 여부를 떠나 작가적 신뢰에 대한 증거처럼 믿어진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이 입체주의의 시원이라는 미술사적 평가로 숭앙되지만, 그 작품에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건 완성작을 앞두고 피카소가 행한 많은 습작들이 남아서다. 10대 시절 남긴 드로잉까지 포괄한 서용선 드로잉집의 편성 탓에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1974년 전후에 그린 줄리앙 브루투스 아폴로 같은 석고 소묘 도판까지 수록되어 있다. 책에 실린 드로잉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소개된 도판으로 1968년 장욱진 화백의 화실에 놀러갔을 때의 상황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일기까지 보인다. 종이 상단에 '68.10.13 月'이라 적어둔 걸 봤다. 연월일과 요일까지 적어둔 거다. 더구나 전업 작가가 되기 이전 기록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내가 주목한 건 그가 쌓아온 드로잉의 분량이 아니라 제작일을 기록하고 과거사를 보관하는 태도였다. 이쯤 되자, '흠. 역시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록편집증. 전적으로 제3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써나간 기록일 텐데, 그럼에도 언젠가 공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성격의 자료다.

* 이 글은 <미술세계>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