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키니 논란은 지금 프랑스의 불관용을 보여준다

2016-08-19     Nathalie Goulet
ⓒTIM WIMBORNE / Reuters

부르키니 논란은 널리 퍼진 분노를 수면 위로 끌어냈다. 프랑스 사회의 일각은 모든 문제를 계속해서 '외국인들', 즉 무슬림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슬람은 모임에서는 박수를, 소셜 미디어에서는 좋아요를 얻어내는 수단이 되었다. 견해는 140자로 축소되었다. 트위터가 정식 논의의 장이 되었다.

지금의 부르키니 논란이 그 증거다. 공론은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생략과 일반화가 혼란을 퍼뜨리고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

부르키니를 사우디 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이나 살라피즘과 연관짓는 사람들에게는 부르키니는 레바논 출신의 오스트레일리아 인 아헤다 자네티가 2004년에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게 좋다.

부르키니 논란을 멈춘다 해도, 우리는 핵심 이슈인 세속주의와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다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히잡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장 가뱅이 영화 'Un Singe en Hiver 겨울의 원숭이'에서 말하듯, "모든 일엔 결과가 따르고, 거시기는 거시기를 만들고, 무작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전신 수영복에 대한 논의는 인권, 프랑스와 걸프 왕국들과의 관계를 아울러야 한다. 이것은 히잡이 여성을 노예화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타당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부르키니는 여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장법과 논증법으로 논의는 계속 퇴행하고, 아무도 시간을 들여 핵심 이슈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공론은 어디 있는가? 대선 후보 중 이성의 목소리에 관심을 모을 사람이 있긴 할까? 극도로 긴장된 지금 분위기에서 누가 우리의 가치를 되살릴 것인가? 누가 크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프랑스에는 프랑스의 무슬림들을 위한 정당한 자리가 있으며, 그들의 인권은 다른 어떤 시민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보장되어 있다고 선언할 것인가?

우리는 왜 이 주제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어 즐기는가? 끔찍한 니스 테러와 하멜 신부 살해 사건 이후, 우리가 왜 무슬림들이 예배를 보는 곳에 대한 해외의 자금 지원과 테러리즘을 연결해야 하는가?

우리를 화합시키는 게 아닌 분열시키는 것들을 더 강화하려는 끊임없는 욕구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소외된 청년들은 다에시(ISIS)로 밀려난다. 다에시는 우리가 부르키니에 대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즐거워하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서 보는 폭력, 그리고 이성적인 목소리의 부재는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끔찍한 올 여름, 우리는 왜 우리를 나치에게서 자유롭게 만든 영웅들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가? 그들은 온갖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슬람의 조직과 기능에 대한 상원 프로젝트와 함께 편견이 없는 보고서를 만든 바 있다. 프랑스의 이슬람은 우리의 법, 그리고 1905년 법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게 명백히 밝혀졌다. 이 진지하고 교육적인 보고서는 이 상황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무슬림 시민들이 존엄을 가지고 종교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술적 해결책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논리를 억압하고 감정을 살리는 이 분위기를 개탄한다. 공포, 연민, 연쇄 반응은 이해하지만, 현재 정치 지도자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허핑턴포스트US의 The Burkini Debate Sheds Light On The Widespread Intolerance In Franc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