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와 종말 사이 | 「부산행」과 재난의 상상력

연상호 감독의 존재는 「부산행」에서 괜찮은 오락영화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끔 만든다. 그의 전작인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는 이제는 거의 모든 예술장르에 걸쳐 희귀해진 리얼리즘의 수작이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를 걷어내면 감독의 전작들과 공명하는 메시지가 추출된다. 회복과 구원의 가능성은 사라졌는데, 우리가 딱히 악해서가 아니라 살려다보니 남과 나를 함께 망가뜨리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에는 좀비 장르 전체를 통틀어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2016-08-04     이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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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영화 「부산행」의 결말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남성자아에 대한 통렬한 진단

그러나 연상호 감독의 존재는 「부산행」에서 괜찮은 오락영화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끔 만든다. 그의 전작인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과 「사이비」(2013)는 이제는 거의 모든 예술장르에 걸쳐 희귀해진 리얼리즘의 수작이다. 사회적으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부 인간군상을 소재로 택하되 취재에 바탕한 듯한 풍부한 세목을 활용하여 한국사회, 특히 한국 남성들의 심성구조 일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강렬한 드라마를 직조한 것이다. 분명 「부산행」은 그런 창작경향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오락영화의 외양 아래 한국사회와 한국 남성자아에 대한 예의 통렬한 진단들이 자리잡고 있고, 이 영화의 이른바 신파 플롯 역시 전작들과는 상당히 변형되어 거의 역전된 형태로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진단을 극화한다고 볼 수도 있다.

온라인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지만 실제 극장에서는 대다수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 영화의 절정부에서, 공유가 연기하는 주인공 캐릭터는 이제 곧 좀비로 전락할 처지이지만 딸의 출산 때를 회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좀비로 변해가는 아빠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는 딸의 절절한 사랑고백을 마침내, 아마도 최초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가 딸을 희망의 장소인 부산으로 데려갈 기관차에 가둬둔 채 열차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이 장면의 감상성은 극대화된다. 감정의 과잉을 자극하는 회상 장면의 삽입을 조롱하는 의견을 온라인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실상 이 영화 전체가 바로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한다.

판타지의 신빙성은 무제한적이지 않고, 엎어치기 전 원래 세상(의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으로 냉정한 평가에 의해 제어된다고 할 때 어쩌면 「부산행」의 판타지(?)는 감독이 전작들에서 냉철하게 해부해놓은 한국 남성들의 생태의 음화(陰畫)일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나름의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돼지의 왕」과 「사이비」를 간략히라도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영화들에서 남성인물들의 문제적 측면이 다소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제시된 면이 있긴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폭력성이 전염되는 남성문화의 구조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예리하다는 것과 그래서 남녀관계 또한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진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밝혀둔다.

영화 속 '좀비 되기'의 함의

이 영화에서 가장 생생하게 구현된 인물은 단연코 김의성이 연기하는 사악하리만큼 이기적인 중년남성이다. 그는 좀비떼에게 주변의 승객들을 미끼로 던져가며 생존을 도모하는 악당이다. 그러나 이 인물이 좀비떼를 통과해온 주인공 일행의 감염 여부를 의심하며 그들을 객실에서 몰아내자고 다른 승객들을 설득할 때, 그는 그 주장에 찬동하는 평범한 승객들, 곧 우리 모두를 대변한다. 그는 가장 강렬한 생존의지를 가진 인물이며, 바로 그런 속성으로 말미암아 영화의 전개방향을 결정하는 키로 작용하기에 말의 본디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protagonist)은 어쩌면 그일 수도 있다.

「부산행」에서 비슷한 결정을 내리는 것의 의미는 그렇게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직전에 언급한 장면에서 중년남성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좀비가 되어버린 단짝 언니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노년의 여성인물은 '평생 착하게 산 보람이 기껏 이거냐'라는 내용의 혼잣말을 한 후에 좀비떼에게 문을 열어준다. 중년남성과 좀비들을 교차로 보여주는 편집은 그 행동을 복수로 규정하고 있지만, 영화의 전체 내용을 생각할 때 의미를 그렇게 축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 영화의 의로운 인물들도 좀비들과 싸우다 지치면 팔뚝을 내어주고서 시간을 벌려 한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판타지 플롯과 길항하는 이런 미묘한 대목들은 마치 좀비 되기를 권하는 듯하다. 이미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좀비와 같기에.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이미 망한 세상에 제대로 된 종말을 선사하는 길이기에. 좀비의 기원을 다룬다는 프리퀄 「서울역」을 봐야겠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