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대정신은 '안전한 놀이터'와 '지속가능한 삶'

'박정희 모델'의 일사분란함, 획일성을 벗어나 개인들의 각기 다른 개성과 장점들이 발현되고, 사회의 활력을 만드는 창조적 실험들이 이뤄지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둘러앉아 이야기하고 힘을 합칠 수 있는 사회가 2016년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 사회의 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새로운 모델 하에서 개인들이 지향하는 것은 더 이상 성장이나 생존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는 적정한 소득을 버는 한편으로 가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균형 있게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2016-06-20     시대정신을 묻는다

희망제작소‧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재단법인 희망제작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진행한 기획연구 '시대정신을 묻는다'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 지향해야 할 미래 가치를 "안전한 '놀이터'와 지속가능한 삶"으로 제시했다.

희망제작소는 지난 6월 15일 오후 서울 시민청 동그라미방에서 '시대정신을 묻는다 결과 발표 간담회'를 열었다. 1부에서는 2015년 12월부터 7개월여 간 진행돼 온 '시대정신을 묻는다' 기획연구의 경과와 함께 분석 과정, 분석 결과 등을 전했다.

11인 인터뷰 '의미 연결망 분석' 결과 제시

희망제작소의 '시대정신을 묻는다' 기획연구는 먼저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리더 및 전문가들의 인터뷰로 진행됐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장덕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장,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 교수,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 등 경제‧사회‧복지‧정치‧과학‧환경‧통일‧외교 등 분야 전문가 총 11인을 대상으로 했다.

이 인터뷰들은 페이스북 게시물 기준으로 '좋아요' 6만 건 이상, 공유 1만 건 이상을 기록하는 등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희망제작소는 데이터 분석 전문가인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와 함께 의미 연결망 분석(semantic network analysis) 방식으로 인터뷰 전문을 분석했다. 김 대표가 이날 설명한 데 따르면 분석 방법은 각 인터뷰 대상들이 한 말 전체에서 가장 빈번히 나타난 핵심화두(Denotation), 그리고 각 단어들의 선후관계 분석을 통해 찾아낸 암묵적 고민(Connotation)를 짚어내는 데서 시작됐다.

다음 단계로 김 대표는 전체 중첩되거나 유사한 개념과 가치 등을 연결해서 해석하기 위해 세 개의 동그라미가 동심원을 이루는 분석틀을 제시했다. 가장 바깥 원에는 사회의 시스템 환경에 대한 설명이 들어간다. 분석 대상인 사회의 주도적 통치 원리 및 수단(거버넌스), 거버넌스 적응 대가로서의 이익(인센티브)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가운데 원에는 그와 같은 환경 하에서 개인들이 취하게 되는 전략적 행태가 들어간다. 거버넌스와 인센티브에 대한 평가(사회적 인식), 그에 따른 전략(사회적 행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심원의 가장 안쪽 동그라미에는 그 사회의 지향 가치, 즉 환경과 행태를 관통하는 가치를 두고자 했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두 개의 과거, 두 가지 실패에 눌린 현재

이 소장은 "현재 한국사회의 많은 갈등과 불안, 위험 요소는 '국가주도 성장지상주의'(박정희 모델), '시장주도 성장지상주의'(IMF 모델)이라는 두 개의 과거가 겹쳐진 결과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두 번째 과거는 격차기반 성장지상주의 모델이다. "사회 구성원 간 격차가 커지면 더 나은 보상을 획득하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 경쟁이 사회 효율성을 높일 것"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내포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격차가 너무 커지면서 생존 조건 확보조차 위태로워지자 오히려 지대추구 현상이 심해졌고, 개인들은 각자도생의 전략을 취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식이 급속도로 약해졌으며, 현재 사회 전반에서 불안이 심화되는 현상과 연결된다.

'안전' 확보 후 '놀이터' 환경 제공해야

안전한 '놀이터'라는 제도적 환경 하에서 개인들이 생존의 위협 없이 창조적인 시도를 하며, 대화와 협력을 통해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모델이다.

'안전'이 확보된 다음에는 다양성이 포용되는 '놀이터'가 사회 구성원, 특히 청년들에게 제공돼야 한다. 이 소장은 "새 환경에서 개인들은 두 가지 새로운 전략을 택할 수 있다"면서 "창조적 실험, 그리고 대화와 협력"이라고 했다.

이 새로운 모델 하에서 개인들이 지향하는 것은 더 이상 성장이나 생존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으로는 적정한 소득을 버는 한편으로 가치 있는 다양한 활동을 균형 있게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장은 "이 모델 하에서는 '양적 성장'이라는 가치는 최우선 위치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라면서 "지속가능성이 상위 가치의 자리에 놓이면 공동체의 활력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 사회 곳곳에서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단위들이 나타나야 한다. 이는 마을공동체일 수도 있고, 학부모나 노동자 같은 이해관계자 조직일 수도 있고, 취미와 관심사 모임일 수도 있다.

어떤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어진 2부 순서에서는 지금까지 해석에 대한 토론이 이뤄졌다. 특히 공동체의 의미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게 제시됐다.

조한혜정 교수도 "재미있는 기획이고 안전한 '놀이터'라는 개념도 재미있다"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시민'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방향으로 가야 할지가 관건"이라고 했다.

또, "한국 사람들에게는 '국가'와 '가족'뿐인데 이제부터라도 진짜 '개인'을 어떻게 회복할지, 스스로 돌볼 인프라를 어떻게 마련할지를 먼저 이야기해야 사회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소득 또는 청년들이 시간적‧금전적 여유를 가지도록 하는 일정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만 '공동체'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들이 있었다. 조한혜정 교수는 "아직 근대적 개인을 경험하지도 못 했는데 다시 '공동체'로 묶으려고 하면 젊은 사람들은 삽시간에 도망갈 것"이라면서 "개인이 회복된 다음에 '내가 너다'라는 인식을 가진 다음 단계 정도로 '시민적 공공성'을 논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맥락에서 "강남역‧구의역에 가서 포스트잇을 붙인 사람들은 개인을 회복한 뒤에 처음으로 '내가 너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로 보인다"고 긍정적인 전망을 전하기도 했다.

"청년‧지방‧농촌의 관점 더 필요하다"

장덕진 소장은 "1972년 시작된 '저부담‧저복지' 체제, 즉 소득세와 기업 부담을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현 조세 구조 안에서는 증세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세 번째 모델을 바라보는 데는 비약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김도훈 대표는 세 번째 모델의 출발점이 '인간 중심 안보'와 '조세 및 부동산 체계 개혁'인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번 분석은 변화의 첫 단추를 어떻게 꿰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한 뒤 "여야 대선 준비팀에서 꼭 참고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시민 참가자 중에는 이번 분석에 포함되지 않은 측면을 지적한 경우가 많았다. 스물여섯 청년활동가라고 밝힌 황희두씨는 "지금 대부분의 청년들이 정치‧사회‧문화에 관심이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변화를 말하는 데 한계가 있어 보인다"면서 "(전문가들이) 청년과 소통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분석 결과 전문과 자료, 그동안의 연구 진행 과정 등은 오는 6월 22일 희망제작소 뉴스레터를 통해 공개된다. 또한 보다 자세한 인터뷰 내용과 후속 논의 결과 등은 올해 안에 서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정리 황세원(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사진 이우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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