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4월 28일, 챔피언은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1967년 4월 28일 소환장을 받은 알리가 휴스턴의 신병 집결지에 나타났다. 이들은 신체검사를 마친 뒤 루이지애나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 그 자리에 모여든 신병들은 모두 26명. 군 장교는 무하마드 알리 대신 캐시어스 클레이를 불렀다. 클레이 아니 알리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이름이 호명되고 징집을 거부할 시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발해졌으나 무하마드 알리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1967년 4월 28일, 떠벌이 알리는 행동하는 알리로 우뚝 섰다.

2016-06-04     김형민
ⓒStringer . / Reuters

불패의 신화를 안고 은퇴했던 로키 마르시아노와는 달리 몇 번씩이나 패배의 쓴잔을 마셨고, 헤비급 타이틀을 25차나 방어했던 조 루이스에는 방어 횟수에서 훨씬 못미친다. 축구의 펠레처럼 정부의 공직을 맡는 등 화려한 은퇴 후 생활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의 스포츠맨으로서의 기량과 전적에 더하여, 1967년 4월 28일, 그가 보여 준 용기 있는 행동 때문이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면서 기라성같은 세계의 강자들을 무너뜨리고 세계 헤비급 타이틀을 세 번씩이나 차지했던 '떠벌이' 알리에게 이 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때나 그 이전이나 흑인들은 취할 수 있는 스탠스는 정해져 있었다. 순박하고 충직한 엉클 톰으로서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착한 흑인으로 살든가 불평분자로, 평화를 위협하는 검둥이로 낙인찍히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헤비급 타이틀을 25차례나 방어한 전설적인 복서 조 루이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백인들의 거부감을 피하기 위해 상대방을 KO시키고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고 백인 여성들과의 기념 사진조차 사양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 입대를 선언하는 등 '엉클 톰'으로서의 책무를 다했지만 그러나 은퇴 후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도박장에서 도어맨 노릇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캐시어스 클레이는 달랐다.

절정의 세계 챔피언 알리에게 닥친 결정적인 시련은 월남전이었다. 알리는 일찌감치 현역 입영 대상자였다. 앞서 언급했듯 조 루이스도 현역에 입대하여 '착한 검둥이'로서의 위상을 선보였던 바, 당연히 알리에게도 그러한 자세가 요구되었다.

"국내에서 흑인들이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데 왜 그들은 나로 하여금 군복을 입고 베트남까지 가서 싸우기를 원하나. 만약 내가 군대에 입대해서 베트콩과 싸우는 것이 2천200만명이나 되는 미국 흑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미국 정부는 나를 징집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일 당장 내 스스로 입대할 것이다." 그리고 알리는 계속 '떠벌였다'.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1967년 4월 28일, 떠벌이 알리는 행동하는 알리로 우뚝 섰다.

알리는 그 이후 그에게 들이닥친 고난의 세월을 기꺼이 감수했고, 끝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 링에 복귀하여 다시금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복서로서 그가 이룬 성과도 위대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가해질 온갖 탄압과 저주와 욕설을 무릅쓰고 세상의 불의와 맞섰고 차별에 저항했으며 백인들의 위선에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그는 더욱 위대해졌다.

애틀란타 올림픽 남자농구 미국과 유고의 하프타임 때 IOC 위원장은 무하마드 알리를 '모시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의 중심도시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고장이었던 애틀란타의 농구장을 꽉 채운 관중들은 감동적인 환호로 알리를 맞았고 IOC는 알리가 던져버린 금메달을 다시 수여했다....... 1992년 황영조에게 금메달을 건네받는 순간의 손기정만큼이나 스포츠가 빚은 최대의 감동이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