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앞에 선 사회책임기업

영국 기업의 한국법인 옥시레킷벤키저가 보여준 모습은 끔찍하다.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중에도 적절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정부 조사가 본격화하자 유한회사로 모습을 바꿔 기업 정보를 감췄다. 제품 유해성에 대한 연구는 입맛대로 나오도록 조작했다. 검찰 수사로 흘러나오는 내용들이다. 그동안 영국 본사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설사병 사망을 막겠다며 거액을 기부하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영국과 영국 기업들이 표방하던 사회책임경영은 기업의 사악함을 감추려는 위장술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사건이 사회책임경영의 큰 흐름 안에서 불거진 우발적인 사고인 것일까? 진실의 순간이 왔다.

2016-04-27     이원재

그런데 어린이 설사를 예방하기 위해 혁신적인 기술 개발과 캠페인이 필요했다.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이 기업이 레킷벤키저였다. 한국 어린이들이 사망하는 등 심각한 고통을 겪게 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든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의 영국 모기업이다. 영국 대표기업들이 편입된 푸치(FTSE)100에 속해 있으며, 60개 나라에 사업장을 두고 200개 나라에 제품을 팔고 있다.

동양제철화학이 설립한 옥시는 2001년 레킷벤키저에 인수됐다. 그 뒤 2011년 유한회사로 법인 성격을 바꾸면서 레킷벤키저코리아로 이름을 바꿨다.

영국 석유기업 비피(BP)는 2010년 미국 연안에 기름을 유출해 바다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사회책임경영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던 모습이 위선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비피는 200억달러(약 20조원)의 벌금을 미국 연방정부에 물어야 했다.

나는 2005년 이후 한국에서 사회책임경영 확산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외국 사례를 찾을 때면 영국의 경험을 중요하게 참고했다. 당시 영국 앤드루 왕자가 한국에 와서 소개했던 영국의 앞서가는 사회책임경영 사례들은 한국 기업에 깊은 인상을 줬다. '악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영국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 관행은 한국 국민연금 운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동안 영국 본사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설사병 사망을 막겠다며 거액을 기부하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영국과 영국 기업들이 표방하던 사회책임경영은 기업의 사악함을 감추려는 위장술이었을까, 아니면 지금 이 사건이 사회책임경영의 큰 흐름 안에서 불거진 우발적인 사고인 것일까? 진실의 순간이 왔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등이 2015년 5월 영국 버크셔(Berkshure) 주의 슬라우시에 소재한 레킷벤키저 그룹(RB)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책임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