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통영·거제·울산 조선소를 가다

2016-04-25     원성윤
ⓒ한겨레

“채무자 신아에스비 주식회사-위 채무자는 2015년 11월17일 창원지방법원 제1파산부로부터 파산선고를 받고 본인이 파산관재인으로 선임됐습니다.”

신아에스비는 6년여에 걸친 긴 구조조정 끝에 지난해 11월 법원의 파산 선고로 문을 닫았다. 1300여명 노동자는 대부분 사표를 내고 떠났다. 1946년 멸치잡이용 어선을 만드는 회사로 출발한 신아에스비는 2000년대 중·후반 세계 10대 조선소로 커나갔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신규 수주가 중단되면서 경영위기에 빠졌고, 2010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지만 정상화에 실패했다. 지난해 4차례에 걸친 매각 시도가 모두 무산되면서 결국 파산 절차를 밟았다.

노동자들은 통영을 떠나 대형 조선사들이 있는 거제로, 울산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발톱은 이제 거제를, 울산을 덮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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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출 1순위, '물량팀'

실직은 하청노동자부터 시작될 것이다. 대형 조선 3사에서 근무하는 사내하청노동자는 3월 말 현재 9만5천명가량이다. 원청 생산직 노동자 한 명당 하청노동자 3.5명이 일한다. 특히 최근 몇년 대형 조선사들이 주력한 해양플랜트 사업에서는 생산직 노동자 10명 가운데 9명이 하청노동자다.

하청노동자 가운데서도 특정 프로젝트의 작업을 재하청받아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를 ‘물량팀’이라고 부른다. 조선업계에 2만명 안팎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조선소에서 급한 ‘물량’이 나왔을 때 10~50명씩 팀을 짜서 신속하게 작업을 해서 납품하는 일을 맡는다.

조선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양대 조선소가 있는 경남 거제시의 조선소 협력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제시 GMP산업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

김씨는 한때 일당 2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전 속했던 하청업체가 폐업한 뒤 새로 들어간 업체는 일당을 2만원 깎으라고 요구했다. 5월부터는 그마저도 20% 줄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김씨는 “일감이 없어서 더 이상 옮길 데도 없으니까 다들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괜히 나섰다가 찍히면 나만 손해 아니냐”고 말했다.

일감이 줄어들면서 원청업체가 하청노동자를 선별해 고용승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침묵은 더욱 깊어졌다. 하청노동자들끼리 “너희 회사는 월급 잘 나오냐”고 안부 인사 묻는 게 고작이다.

■ 임금 못 받는 하청노동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들도 잇따라 임금 삭감을 예고했다. “임금 10%, 수당 30%를 깎으면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선소로 옮길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임금을 삭감했는데 6월 이후에 해고되면 퇴직금까지 반토막난다. 지금 사표를 내고 퇴직금이라도 제대로 챙기는 게 낫다. 그러나 조선업이 불황이라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결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지난 22일 울산 전하동 현대중공업 조선소 앞에서 만난 정아무개(49)씨의 말이다. 올해 들어 3월까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2600여명이 이미 회사를 떠났다. 8년간 현대중공업의 하청노동자로 일해온 정씨는 “이제 내 차례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월급 300만원으로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 두 아들을 키우려면 항상 빠듯하다. 업체는 최근 “한 달에 일주일씩 무급휴직을 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휴업을 하면 사용자는 휴업기간 중 근로자에게 평균임금의 70% 이상을 수당으로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지켜지지 않는다.

경남 통영시 중소 조선사들이 위치했던 동네엔 불황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웠다. 폐업 공고가 붙어 있는 조선업체 ‘신아에스비’ 인근 도남동 상가에 지난 22일 오후 국밥집을 제외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모습이다. 통영/김성광 기자

■ 떨고 있는 원청 정규직

고용불안은 하청노동자를 넘어 원청 정규직 노동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지난 20일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누리집 게시판에는 ‘비상경영체제 선포’라는 글이 떴다. 최대 3000명의 직영 노동자(정규직)를 구조조정하고, 업무를 통폐합해 100개 이상의 부서를 없애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중공업 홍보팀 관계자는 “아직 확정된 구조조정 방안은 없다”고 밝혔지만 구조조정 계획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현대중공업은 이르면 오는 27일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할 계획이다.

거제시 삼성중공업 전경.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또 해양플랜트 설계 인력이 있던 서울 사무소를 접고 해당 인력을 울산 본사로 이동시킬 방침이다. 이동 대상이 된 대우조선해양 직원은 “인력 구조조정을 한다는데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이제라도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올해 들어 4개월 동안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가 5건이나 발생했다.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은 “구조조정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직영, 하청 할 것 없이 노동 의욕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에 물량 감소로 업체 간 경쟁이 심해져서 산업재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