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 1조 2항의 망령

내가 우려하는 건 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그룹 정체성에 맞지 않거나 회장님 방침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임직원들은 컷오프 될 것이다. 두산그룹 계열사는 40대 직원이 명퇴를 거부하자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게 하는 면벽(面壁) 책상 배치를 했다. 유승민 의원의 자진사퇴를 집요하게 압박하며 공천 발표를 미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 대한 무례함은 권력자의 습관이다.

2016-03-23     권석천
ⓒGettyimage/이매진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온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이며...대표민주제와 직접민주제를 병행시키고 있다...유신헌법의 이념자(理念者)인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하고 효율적 정부체제를 원하였다...대통령의 지위 강화는 현대국가에 있어서의 '권력의 인격화'로 특징 지워지며....'

그러나 박종희 공천관리위원은 당 정체성을 당헌 8조에서 찾았다.(1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당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적극 뒷받침하며 그 결과에 대하여 대통령과 함께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그의 주장대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정의보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우선한다면 새누리당의 정체성은 유신헌법 1조 2항에 가깝다.

국정에 여당 의원들의 협조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문제는 협조를 구하는 방식이다. 대화와 설득이 아닌 공천권으로 각을 잡는다고 해서 국정이 뜻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일사불란한 조직은 위험하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한 건 불량 고무 오링(O-ring)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 원인은 실무기술자들이 입을 닫은 채 상부 지시를 수동적으로 따른 데 있었다. 내부에서 비판·교정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문제가 조직의 존립을 뒤흔드는 파국으로 이어진다.(『착각하는 CEO』)

내가 우려하는 건 사회에 미칠 영향이다. 그룹 정체성에 맞지 않거나 회장님 방침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임직원들은 컷오프 될 것이다. 두산그룹 계열사는 40대 직원이 명퇴를 거부하자 하루 종일 벽만 바라보게 하는 면벽(面壁) 책상 배치를 했다. 유승민 의원의 자진사퇴를 집요하게 압박하며 공천 발표를 미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에 대한 무례함은 권력자의 습관이다.

내부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조금 더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유신헌법 1조 2항의 위력이 크다 한들 시대를 되돌릴 순 없다. 그건 우리가 살아온 시간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지금 우리의 헌법이다.

* 이 글은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