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20대 초중반의 연애는 항상 '대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대학생'의 일상으로 가시화된다. 이것은 20대 초중반이 종종 '대학생'으로 뭉뚱그려지는 안이한 범주화와도 관련이 깊다. 미디어나 풍문 속 연애는 언제나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연애의 대상은 '복학생 오빠'거나, '새내기 여대생', '과 선배'의 기표로 등장하고 소비된다. 연애 자본은 이렇게 계급화된 학벌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연애가 정말 그토록 자연스럽고, 지극히 좋은 것이며, 청춘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마땅한 가치라면, 어째서 이 사회는 청춘을 항상 '대학생'으로 소환하고 캠퍼스 러브 스토리를 이상적 로맨스로 제공하느냔 말이다.

2016-02-18     짐송

[연애하지 않을 자유]

지난번 연재에서는 '무성애자 라인'의 저주를 풀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과거를 고백했다. 이때 '무성애자 라인'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동아리에서 사용했던 표현으로, 실제 '무성애자'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다. 개념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 실수였다. 무성애자는 타인에게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않는 이를 의미하니, 연애하지 않음을 뜻하니 이 라인에는 '비연애자' 혹은 '연애 무첨가'라는 이름이 더 맞춤할 것이다.

공장-미싱/대학-미팅이라는 도식은 대학의 간판을 기준으로 이 세상의 대우가 달라질 것을 암시한다. 이때 미팅은 성공적으로 그 과업(!)을 수행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며, 좋지 못한 성적은 곧장 공장과 미싱으로 치환된다. 10대 후반에게 대학생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은 학벌이 작동하는 연애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것을 요청하고, 연애를 특정 군의 생활양식으로 제한한다.

연말과 연초는 수능부터 합격자 발표가 길게는 3개월까지 이어지는, 대입 '제철'이다. 수많은 레 미제라블들은 갑오개혁 직후 처음으로 새경을 쳐서 나온 노비처럼, 수험표와 신분증을 들고 이전까지 금지되었던 구역들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을 것이다. 예체능 계열은 실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것이고. 이렇게 많은 수험생들이 합격과 불합격의 기로에서 전전긍하는 한편, 수능을 친 입시생만을 학생으로 호명하는 세계에서 '수험생이 아닌'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아닌 열아홉'들'이 존재한다.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투명 가방끈'의 회원들은 매년 대학거부 선언을 해 왔다. 이 무수한 이들의 앞에 놓인 길은 '공장'으로 단일화할 수 없이 다양하고, 훨씬 복잡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을 것이다. 그 길에 연애는 단지 비가시화되었을 뿐 있을 수 있고, 또 당연히 없을 수도 있다. 대학 생활이 미팅과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 대학생이 아닌 삶이 곧 미팅 대신 미싱을 의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공장에서 미싱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대학 가서 미팅'하는 삶과 대척점에 놓여 본보기처럼 제시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게재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