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힌 페이지, 혼돈의 미로 | NEW52 배트맨에 영향을 준 인물 열전

뒤집힌 페이지의 역사는 일명 만화계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불렸던 작가, 만화 속에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팝아트, 옵티컬 아트 등 현대 미술의 요소를 적절히 도입하여 미술학도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만화에서 찾게 하고, 만화라는 매체의 현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짐 스테랑코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02-15     이규원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0] 뒤집힌 페이지, 혼돈의 미로

─ NEW52 배트맨에 영향을 준 인물 열전

스콧 스나이더와 그렉 카풀로의 배트맨 시리즈 첫 작품인 『올빼미 법정』. 이 책을 받아든 독자들이 하나같이 궁금해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배트맨이 올빼미 법정의 미로를 헤매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멀쩡하던 페이지가 한 장을 넘기면 90도로 회전해 옆으로 누워 있고, 또 한 장 넘기면 완전히 뒤집어져서 내용을 읽으려면 책을 손에서 돌려 가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는 인쇄가 잘못된 거 아니냐며 전화를 할 정도였다. 미국에서 책을 출판할 당시에 그렉 카풀로에 대한 DC 편집부의 반응도 비슷했다. 페이지를 뒤집는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분명히 인쇄 오류라고 오해할 거야! 하지만 기발한 발상이긴 해! 그래서 처음에 허락했던 것이 중간에 번복되어 급기야 카풀로도 뚜껑이 열리고 만다. 왜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몰라보는 거야! 그런데 실은 이런 사연이 있다는 자체가 이미 그 아이디어가 얼마나 성공적인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뒤집힌 페이지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편집자이건 최후에 책을 읽는 독자이건 간에 모두 미로 속에서 배트맨이 겪는 혼란을 똑같이 경험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책을 돌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다!

인쇄 오류 확인 전화가 오곤 했던 『올빼미 법정』 본문.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미로는 내가 원조지.”

《스트레인지 테일즈》166호 본문.

(이미지 출처: https://s-media-cache-ak0.pinimg.com/236x/44/32/ce/4432ce8bd883a447fbb20fb156fa5215.jpg)

느와르와 팝 아트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이미지 출처: https://s-media-cache-ak0.pinimg.com/736x/06/bb/b6/06bbb6e8fcca54ba4f12770d1742a55a.jpg)

짐 스테랑코

그런 와중에도 특별한 사례들이 몇몇 있었는데, 예를 들어 원더우먼의 아버지 윌리엄 마스턴 박사는 심리학 박사이자 거짓말 탐지기의 발명가, 여성 인권 운동가로 만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실험하기 위해서 원더우먼 만화를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흔히 '덕후'라 불리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돈 대신 오로지 '덕'을 목적으로 SF를 탐독하고, 현재와 비교하면 원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통신 기술이 낙후된 시대에 며칠이 걸리는 편지로 소식을 전하며 팬클럽을 결성하고 팬 매거진을 만들어 급기야 슈퍼 히어로 만화의 편집자로 덕업일치의 길을 걸었던 줄리 슈왈츠 같은 선구자적인 편집자도 존재했다.

만화의 교육적 효용을 입증하기 위해 태어난,

그녀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1941년 《올 스타 코믹스》 8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All-Star_Comics_Vol_1_8?file=All-Star_Comics_8.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그의 작품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의 표지 오마쥬들.

그는 회사와 시대를 초월해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1966년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당시 마블의 편집자 스탠 리였다. 그는 스테랑코가 가져온 그림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뒤에 꽂혀 있는 만화책 중에 아무거나 하나 골라!" 그건 굉장한 말이었다. 1966년이면 《판타스틱 포》와 《헐크》, 《스파이더맨》 등으로 마블이 만화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고, 사실상 스탠 리와 잭 커비 최고의 전성기였다. 당시 마블의 거의 모든 타이틀을 잭 커비가 맡고 있었는데, 커비의 작품을 하나 빼서 짐에게 넘겨줘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스테랑코가 다른 잘나가는 모든 타이틀을 제쳐두고 고른 것이 바로 《스트레인지 테일즈》였고, 이 잡지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날 사뮤엘 잭슨이 분한 카리스마 넘치는 슈퍼 스파이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였다.

잭 커비의 레이아웃을 연필화와 펜화로 마무리하며 스테랑코가 처음으로 「닉 퓨리, 에이전트 오브 쉴드」에 참여한 《스트레인지 테일즈》151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marvel.wikia.com/wiki/Strange_Tales_Vol_1_135?file=Strange_Tales_Vol_1_151.jpg)

미로와 패널 뒤집기의 원조.

이런 이야기가 더 궁금하신 '덕후' 분들이라면 2015년 1월에 3회에 걸쳐 KBS에서 방영된 '세상의 모든 다큐' - 슈퍼 히어로 3부작을 보면 스테랑코 본인의 진술을 통해서 관련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 미라클

우주와 신들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크 사이드와 제4 세계의 이야기 역시 배트맨과 무관하지 않다. 국내 출판된 만화 중에 『슈퍼맨 배트맨: 슈퍼걸』을 읽어 보면 배트맨이 빅 바르다 등과 함께 아포칼립스로 가서 다크 사이드와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번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영화 예고편에서도 다크 사이드를 상징하는 오메가 문양이 비쳤고, 만화 원작에서도 배트맨의 죽음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다크 사이드인 만큼 고담 밖에서 벌어지는 배트맨의 우주적 활약상이 궁금한 팬들은 관심을 가져 봐도 좋을 듯하다.

영상 중간의 날개 달린 괴물들은 배트맨의 상상일까? 아니면 다크사이드의 부하 파라데몬일까? 3월 23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예고편.

(영상 출처: http://tvcast.naver.com/v/639147)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