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더글라스 |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개인적 차원에서 드러난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법률가로서 그의 사상과 철학만은 변함없이 내 의식을 지배해 왔다. 어느 사회에서나 90퍼센트의 법률가는 상위 10퍼센트 국민의 이익에 기식하여 삶을 영위한다. 나머지 10퍼센트만이라도 더글라스처럼 90퍼센트의 지친 영혼에게 연민의 눈길을 주는 나라, 그런 나라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

2016-02-05     안경환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윌리엄 더글라스 평전 | 위대한 이름 불행한 인간> 서문과 후기입니다.

<서문>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위인전을 싫어했다.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 군자와 소인, 위대한 사람과 비열한 인간,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 두 부류의 인간만 있다고 가르치는 듯했다. 읽는 이의 열등감을 강요하는 주인공의 행적에 압도되었다. 위인은 모두 진실하고 올바른 인간이라는 도식이 불편했다. 내가 읽은 법률가는 시종일관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서는 사람뿐이었다. 옳은 일을 하는 인간은 조그마한 도덕적 흠도 없어야만 했다. 살고 보니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다.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우선 나와 내 아버지의 스승이셨던 역사학자 약전 (藥田) 김성식 (金成植, 1908- 1986)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암울하던 군사독재 시절 '마지막 선비'로 칭송받던 약전선생님이야말로 언행일치의 표상이셨다. 1980년,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나서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보시면서 선생님은 딱 한 마디 하셨다. "돌아오는 거지!" 1986년 1월, 유학과정을 마무리한 나는 일시 귀국하여 선생님께 진로를 상의 드렸다. 한 주 후에 다시 뵙기로 했다. "네 아버지 묘소에 가거든 너를 남겨주어서 고맙다는 내 말을 전해라." 사흘 후, 경남 밀양의 산촌 고옥에서 나는 선생님의 돌연한 부음을 접했다. 황망했다. 그때 심경을 이렇게 썼다. "...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가심을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리라. 지난 10여 년 간 캄캄한 내 세계를 밝혀주던 큰 별은 사라졌고, 그 찬란한 빛을 내 어디서 다시 찾으리오만, 그래도 나는 끊임없이 찾으리라. 끝내 찾지 못하면 내 작은 반딧불이라도 스스로 밝히리라. 언젠가는 별빛도 반딧불도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그날이, 밝은 태양이 내 조국 산하를 영원히 비출 그날이 오리라 굳게 믿으면서."1) 여섯 달 후, 나는 더글라스의 판결문을 분석한 논문집을 첫 저서로 내어 선생님의 영전에 바쳤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주셨다. 선생님의 생전에 바치고 싶었던 소망은 불과 몇 개월의 시차로 무너졌지만 천국에서라도 이 책을 보시면 대견해 하시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약자의 고난과 슬픔에 동참하는 행위라고 하신 선생님이기에 약자의 대변인, 인류의 후견인 다글라스 판사가 흘린 연민의 눈물에 합루(合淚)하시리라."2)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모란공원에 모셨던 선생님의 묘소마저 내 기억과 추적권을 벗어났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감화는 한 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예비학자로서는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나를 모교의 교수로 채용해 주신 석암(碩岩) 배재식 교수님(1929-1996)의 열린 자세에 때늦은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초임교수의 객기로 적지 않은 불편함을 안겨드렸지만 언제나 혼화한 미소로 품어주신 배학장님의 은혜는 내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대학원 시절 이래 이수성교수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총애는 내 평생의 축복이다. 함께 재직했던 많은 선후배 동료들의 인도와 사랑에 감사드린다. 더글라스처럼 나이가 들어도 늙은이가 되지 않도록 청청한 정기를 공급해준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3) 동급생 중에서 데니스 정(Dennis Jung), 에밀리오 후에르타( Emilio Huerta), 미구엘 데마판 (Miguel Demapan) 유티오 덴고클 ( Yukiwo Dengokl), 네 사람과 나눈 진한 우정은 오랜 추억거리다. (이들은 모두 더글라스 철학의 찬미자들이었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더글라스 자료의 열람에는 B.A. Kufner, Pablito Garcia Fuentes, 두 분의 노고가 컸다. 더글라스의 향리, 야키마와 왈라왈라 방문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야키마밸리박물관 역사연구회(Yakima Valley Museum History Society)의 다이에너 리 (Dinah Lee) 스탠리 와거너 (Stanley Wagner Jr.) 변호사, 두 분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04년, 당시 생면부지의 필자에게 자신의 저술을 헌정했던 시카고 대학의 톰 긴즈버그 (Tom Ginsburg)교수에게 때늦은 답례를 드린다.4)

이 책을 오랜 친우 박용일에게 드린다. 용일은 내가 알게 된 무수한 법률가들 중에 더글라스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다. 불우한 초년을 살아 넘긴 의지의 삶도 그러하려니와 작은 불의도 참지 못하는 원칙론자의 성마름, 산과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열정과 사랑, 가히 주위를 위축시키는 강건한 신체, 때때로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과도한 낭만성... 이 모든 점에서 용일은 내게는 더글라스의 현신이었다. 게다가 더글라스와는 달리 가족의 무한 신뢰라는 축복을 누리고 사는 그를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행복한 일이었다. 그가 이 나라에서 헌법재판관이 되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다.

<후기>

5) 너무나 쉽게 대학원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것으로 학교는 끝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짓말 같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이 바뀌는 듯했고 아직 버리지 못한 숨은 열망이 되살아났다. 민주주의, 헌법, 국가와 국민, 소수자와 인권... 아무런 대책 없이 대기업 중견간부 생활을 접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서른세 살 만학도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던 어휘들이었다. 이 산만한 관념들을 궤는 중심축이 윌리엄 더글라스 판사였다. 대학원 시절에 그리스월드 판결을 읽고 받은 감동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생생했다.

6) 픽션과 논픽션의 구분이 명확치 않은 채 사람들의 뒷이야기가 따랐다.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버거 원장에 대해 가장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다. 원장으로서나 개인적으로나 버거는 언론의 취재에 매우 비협조적이었다고 했다. 그 책에는 만년의 더글라스가 버거에게 냉소와 경멸로 일관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7)이라며 농담을 했다.

8)

9) 변호사 선서에 이어 몇 주에 걸쳐 여유롭게 워싱턴을 탐방했다. 마치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장면들을 재현하는 기분이 들었다.10) 그동안 나는 산타클라라 대학에서 갤로웨이 교수의 지도로 체계적인 대법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재학 중에 갤로웨이의 책, 「법은 누구편인가」 를 번역한 이유도 더글라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11) 갤로웨이는 오하이오주 우스터 (Wooster)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에서 인권변호사의 길에 나섰다. 더글라스처럼 장로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통합신학'을 공부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얻었다.

그의 무덤이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도 찾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Eternal Flame)이 밝히는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묘소 근처였다. 그때 이미 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케네디의 인기는 여전했다. 더글라스의 무덤은 소략했다. 누군가가 남긴 시든 꽃다발이 처연했다. 묘석의 앞면에 '이등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뜻밖이었다.

대법원 건물 지척에 폴저스 (Folgers) 셰익스피어 도서관이 있었다. 뜻밖의 발견이다. 대법원건물보다 몇 년 먼저 건축되었다. 이따금씩 대법관들이 퇴근길에 들린다고 했다. 브레넌과 오코너가 단골이라고 했다. 1993년 통계로 미국법원의 판결에 셰익스피어가 인용된 회수가 800회가 넘었다.12) 나도 즉시 회원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회비를 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이날에 이르기까지 전자우편으로 소식을 접하고 있다.

13)

노스 피프스 애비뉴 111번지, 어머니 쥴리아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으로 구입한 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더글라스가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표지판도 없다. 그가 다녔던 컬럼비아 초등학교 자리에는 컬럼비아 은행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궁색한 단독개업 변호사 사무실과 비교적 규모가 큰 합동법률사무소가 서로 지척에 있다. 대형 수퍼, 세이프 웨이(Safe Way)도 들어섰다. 더글라스 시절처럼 철도를 기준으로 한 '갑'지구, '을'지구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야키마 상류사회는 도심에서 물러나 교외로 이주한지 오래다. 이 도시의 중심대로 야키마 애비뉴에 선 작은 중국식당에서 뷰페 점심을 들었다. 근래 타이완에서 이민 온 주인이 '안녕하세요?'를 연발하며 반긴다. 한국 드라마를 즐긴다는 안주인도 내 피부색에 친근감이 드는 모양이다.

야키마 기차역 위로 고가도로가 생겼다. 밸리는 4계절이 분명한 곳이다. 과일농사는 여전하다. 아직도 멕시코 계절노동자가 온다고 한다. 사과, 포도, 베리 등 농장을 운영하는 한국 사람도 더러 있다. 인근의 야키마국(國)문화센터 (Yakima Nation Cultural Center)를 찾았다. 더글라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점원에게 연유를 물었다. 잘 모르지만 인디언을 사랑했던 판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2011년 1월 31자 Yakima Nation Review (1970 창간)에 실린 대로 정체성의 상실 위기에 직면한 인디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세삼 처연하다.

윌리엄 더글라스,

아프다

껴안으면 더욱

시간을 사막에 묻으면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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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경환 「미국법의 이론적 조명: 윌리암 다글라스 판사의 법사상」 (고시계, 1986) (서문 1986. 7.15).이 책의 출간에는 대학시절 절친했던 고 김상철 변호사(1947-2012)의 격려와 도움이 컸다. 앞서 펴낸 나의 첫 번째 번역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Russell W. Galloway Jr. The Rich and the Poor In Supreme Court History (1983); 안경환 역 「법은 누구편인가」 (고시계, 1985). 그는 현행헌법에 헌법재판소 규정이 도입되도록 기여한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함께 나눈 그 시절 추억을 담아 옛 친우의 명복을 빈다.

4) Tom Ginsburg, Legal Reform In Korea (Routledge Publishing, 2004).

6) 대법관들은 판결문에서 서로를 '형제'(brother)로 부르는 전통에 착안한 제목이다. 당시까지는 여성 대법관이 한 사람도 없었다. 최소의 여성대법관 샌드라 오코너는 1982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

8) Daniel Kahikina Akaka(李硕)(1924- ) 아메리카 인디언과 중국인의 혼혈로 민주당 연방하원의원 (1976- 1990)을 거쳐 상원의원(1990- 2013)으로 재직했다. 용일은 후일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사무실에 배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케네디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10) 〈 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7). 이 영화는 1989년 미 의회가 역사상 최초로 선정한 미국의 '필름문화재' 25편 중 하나다. 안경환, 「이카루스의 날개로 하늘을 향해 날다」(효형출판, 2001) pp.10-24.

12) 안경환, 「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13) "He was easier to admire than t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