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에 들뜬 국민, 무거운 현실 | 아웅산 수치의 미얀마

버마- 미얀마의 군부는 한국의 통치술을 배웠노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곤 했다.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3분의 1의 지명권을 준 유신헌법(1972-1980)이 미얀마 새 헌법의 모델이다. 한동안 양곤대학 캠퍼스는 폐쇄, 분산, 이전을 거듭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동숭동에서 관악산으로 이전한 사실도 학생운동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묘수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2016-01-15     안경환
ⓒASSOCIATED PRESS

10년 사이의 변화

그러나 현지 상황은 바깥에서 듣던 것처럼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군사정부가 그토록 오래 집권한 것은 국민의 신뢰가 아주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 인도와 중국 사이의 긴장을 십분 활용하는 등 국제적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한 외교술이 돋보였다. 오지를 연결하는 지방도로, 교량과 수리시설의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의 구축에 감사하는 지방주민들이 많았다. 소수민족의 정치적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여 세력 균형을 이룬 점도 점수를 얻을 만했다. 또한 개방정책을 통해 상당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선진외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테크노크랫의 양성체제를 만든 공적도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체제의 원천적 정당성 문제를 접어둔다면 군사정부는 한 나라를 이끌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오로지 민주적 이상에 의지하여 숭고한 반대자의 길을 걸어왔던 수치와 이름뿐인 그녀의 정당(NLD)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군부를 지원하는 결과가 된다며 외국자본의 투자를 말리고 심지어는 버마에 여행조차 오지 말라는 당부를 당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는 수준이었다. 도덕적 원칙에 충실한 만큼 지극히 비현실적인 수치와 정당은 더 나은 삶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제도로 체화하는 과제를 감당하기에는 괴리가 너무나 커 보였다.

2015년 11월, 다시 찾은 미얀마는 완연하게 달라 보인다. 희미하게나마 출구가 보인다. 지난 10년 동안 국제사회의 압력은 한층 강도를 더했다. 군부 지도자들도 한결 유연해졌다. 강경, 온건 세력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기는 힘들 것이다. 국내시장의 개방도 가속화되었다.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산업이 탄생했다. "미얀마에서는 환경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도무지 공장이 없으니까." 한때의 유행어는 이제 자취를 감춘 옛말이 되었다. 1997년 아세안(ASEAN)에 가입했고 2014년에는 의장국이 되기도 했다. 2011년 11월 국가인권회가 설립되었다. '독립된 기관'일 것을 요구한 유엔의 기준에는 한참 미달하는 '알리바이 기관'에 불과하지만 인권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국가기관이 탄생한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올해 11월 선거는 수치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상·하원 선출직 491석중 390석을 확보하여 군부에게 자동 할당된 166석(25%)를 제외하고도 과반수를 훌쩍 넘겼다. 변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기대는 어느 때보다 드높아 보인다. 희망에 벅찬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조지 오웰의 나라

1947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가 버마는 복수정당제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고 1950년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전도양양한 신생국가로 비쳤다. 비옥한 땅, 식견 높은 정치지도자, 풍성한 문화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정착, 이 모든 면에서 버마는 모범국이었다. 그러나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군사정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바로 '동물농장'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돼지들은 인간의 농장을 반란으로 무너뜨리고 동물공화국을 세운다."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혁명' 슬로건을 내거나 돼지계급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라는 단서(但書)가 덧붙여진다. 버마의 군부가 곧 돼지다.「1984년」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이 처참하게 유린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렸다. 엄혹한 경찰국가, 무자비한 군사독재에 시달리는 미얀마인의 일상이다. 이런 나라에서 '조지 오웰 독서 클럽'이 불온단체로 낙인찍히고 그의 작품이 유통 금지되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청년학생의 이상과 좌절

마웅 소에게 이 나라 민주화 운동의 성지들을 안내하라고 주문했다. 유니버시티 애비뉴 54번지, 수치의 저택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과거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양곤대학 중앙도서관의 사서주임은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그의 학생시절을 기억하는 듯했다. 대학 정문 오른편에 철망으로 가둔 녹지가 보인다. 오래전에 학생회관이 서 있던 자리다. 네윈 시절에 학생회관을 철거하고 새들의 놀이터로 조성했다고 한다. 수위는 '허락 없이' 철망 안을 들여다보는 외부인에게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철망 너머 보 아웅 키유(Bo Aung Kyaw)의 기념비가 마구 자란 초목 사이에 스산한 모습으로 서 있다. ('보'는 지도자라는 뜻의 타이틀이다.) 1938년 12월 20일, 영국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은 최초의 학생이다. 붉은 벽돌의 바고(Bago) 남학생기숙사는 아웅산이 학생시절에 기숙했던 건물이다. 버마 독립운동의 요람인 셈이다.

아웅민 키네는 갓 17살이 된 고등학생이다. 2015년 3월 10일, 양곤에서 1백여 마일 떨어진 중소도시 레파단에서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정부가 공표한 '학원안정법'의 제정을 반대하여 나선 것이다. 일부지역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비밀 연대조직이 결성되어 있다고 한다. 경찰의 무차별 폭력이 따랐다. 3월 23일자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소년을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다. 포효하는 듯 공중에 몸을 날리며 소리치는 소년을 에워싸고 십여 명의 정복 경찰이 곤봉 세례를 퍼붓는 사진이다. 소년은 2개월 이상 타라와디 감옥에 감금되었다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어린 나이를 감안한 재판부의 배려라고 했다. 소년은 국가인원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했고 인권위는 이례적으로 경찰이 시위의 진압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고 의견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인 '집회 시위의 자유'에 관해서는 언급을 생략했다.

로버트 산 마웅은 특이한 변호사다. 여섯 차례 정치범으로 체포되었고 총 13년간 복역했다. 감옥 안이든 밖이든 버마의 모든 정치범 뒤에는 그가 버티고 있었다. 2012년에 정지되었던 변호사 자격을 되돌려 받았다. 2015년 마틴 에널스 인권상 (Martin Ennals Award for Human Rights Defenders)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작고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이름을 따서 1993년에 창설된 이 상에는 인권운동가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이 따른다. 양곤 시내 허름한 거리에 자리한 옹색한 거소 겸 사무실에 '위생법 클리닉' (Hygienic Legal Clinic)이라는 당호(堂號)가 붙어 있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법률사무소라는 뜻이다.

마 탄다르 (Ma Thandar)는 11월 총선에서 수치의 당 (NLD)후보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어 2016년 2월 정식으로 등원한다. 지역구는 이라와디지구 (Division)의 엔메타운 (Enmae Township)이다. 그녀는 2014년 8월, 군부의 총탄에 남편을 잃었다.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코 파게티 (Ko Par Geti) 사건이다. 언론인이었던 남편은 군부의 비리를 취재하다 살해당한 것이다. 서둘러 암매장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군부는 그가 무기를 뺏으려 했기에 살해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군인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내는 상, 하 양원에 청원을 냈으나 감감무소식이다. 다만 청원을 받은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에 대고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인권위는 두 차례 의례적인 안부 문의를 했을 뿐이다. 자신이 국회에 등원하면 진상조사와 가해자의 처벌이 이루어질 것 같으냐고 묻자 그녀는 쓸쓸히 웃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건네준 작은 부채에 그려진 수치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버마 군대의 헌법적 특권

457개 조문으로 치장한 새 헌법은 이례적으로 권력구조 조항을 앞에 세우고 기본권조항(8장)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현실의 정직한 투영인 셈이다. 헌법은 대통령의 자격으로 혈통의 순수성을 요구한다. 즉 배우자나 직계존비속이 외국국적을 보유하거나 하였던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물론 수치를 염두에 둔 규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 정서의 뿌리는 깊다. 1947년 헌법과 1974년 헌법에도 유사한 조항이 있었다.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으로 20년 이상 외국에서 체류한 사람은 공직에 나설 수 없었다.

버마 속의 한국

양곤의 상징물, 쉐다곤사원 옆에 작은 '국립묘지'가 있다. 오로지 아웅산 장군과 그와 함께 암살당한 여덟 명의 건국영웅을 위한 유택이다. 국빈 방문이 아니면 일 년에 단 한차례, 순국일에만 열던 성지를 최근 들어 상시 개방했다. 1983년 10월 9일, 바로 그 자리에서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을 노린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17명의 한국 동량이 산화했다. 2014년 현충일에 널찍한 추모비가 묘지 바깥쪽에 세워졌다. 하루에도 백여 명의 한국인 관광객이 들른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 3명 중 둘은 즉시 사살되고 생포된 한 사람은 재판을 받았다. 강영철 (강민철) 인민군 대위는 범행을 자백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를 보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면으로 사실을 부인했다. 강영철도 그의 조국도 서로를 배신한 셈이다. 33년째 강영철은 인 세인 감옥에 갇혀 있다. 독방에 격리되어 있다고도 하고, 무자헤딘과 같은 외국인 테러범과들과 합사되어 있다고도 한다. 연전에는 이미 죽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탐문 끝에 접한 풍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 단 한 사람의 면회객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했던 김신조와 1987년 11월 KAL기를 폭파했던 김현희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착잡한 마음이 든다. 모두가 민족 분단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청춘들이다. 그래도 김신조와 김현희에게는 과오를 품어 안아줄 또 하나의 조국이 있었다. 아직 50대를 넘기지 않았을 강영철이다. 만약 내일이라도 그가 석방된다면 육신을 의탁할 곳이 어디 어딜까? 사상과 체제와 범죄를 떠나 한 동족의 기구한 운명 앞에 우울한 상념이 밀려든다.

레이디 수치의 숙제

(필자는 2015년 11월 15-19일 동안 미얀마 인권위원회와 인권현안에 관한 국제조사단의 일원으로 양곤을 방문하여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미얀마의 현황을 취재했다.)

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가 지난달 13일 당원, 시민들과 함께 청결 캠페인을 하고 있다.

* 이 글은 신동아(2016년 1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