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샤를리다'의 아티스트가 아직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걸 일깨워 준다

2016-01-09     김도훈

그 날 이후 ‘내가 샤를리다’는 전세계 소셜 미디어 프로필 사진, 포스터, 매체 1면에 실렸다. 1년이 지난 뒤에도 열기는 여전하다. 파리의 아트 디렉터이자 뮤직 저널리스트인 조아킴 롱생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전세계의 연대를 보여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롱생은 ‘내가 샤를리다’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 별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1주기를 맞은 지금, 기념과 추모 행사가 시작되는 가운데 그는 허핑턴 포스트 프랑스와 ‘내가 샤를리다’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당신은 2015년 1월 7일에 어디에 있었는가?

트위터에서 소식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방금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당신은 말과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당신은 샤를리 에브도를 꾸준히 애독했는가?

당신의 반응은 이미지를 만들어 트위터에 올리는 것이었나?

그 날 이후 ‘내가 샤를리다’의 깊은 의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워싱턴 포스트는 ‘내가 Je suis’를 둘러싼 집단적 정신을 논했다. ‘suis’를 두고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이 동사 ‘etre’(be 동사)의 변형인지 동사 ‘suivre’(따르다)의 변형인지를 이야기했다. 당신은 이런 해석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나 분석과 과거 사례 분석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미지와 말로 할 수 있다. 엠마뉴엘 토드가 그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나의 분석은 아니지만, 1월 11일 행진은 거대한 가장 무도회이고 프랑스 인구를 제대로 대변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글이 있었다. 나는 1월 11일에 1월 7, 8, 9일의 피해자들에 대한 교감과 연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슬로건이 전세계적 영향력을 갖게 되면 반대 의견도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논쟁이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비난을 하고 [찬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 슬로건이 당신 손에서 벗어났다는 인상을 받았는가?

내가 특허를 낸 메시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내가 샤를리다’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으려고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얼른 INPI(산업 재산권 기관)에 문의했다. 그게 무료라는 것, 그 누구도, 나조차도 그걸 특허로 삼을 수 없어야 한다는 게 내겐 중요했다. 내 역할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INPI는 ‘내가 샤를리다’에 대한 특허는 받지 않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슬로건을 도용했다. 아주 아름다운 예, 아주 재미있는 예들도 있었지만, ‘내가 샤를리 쿨리발리다’(주: 샤를리 에브도 공격 사건과 함께 일어난 몽루주 테러의 범인 아메디 쿨리발리)라든가 ‘내가 샤를리 마르텔이다’(주: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을 격퇴했던 프랑크 왕국 군주 샤를 마르텔)과 같은 끔찍한 것들도 있었다. 피해자들이 매장되기도 전에 나왔다. 나로선 믿기 힘들었다.

당신은 1월 7일 이후 생존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는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샤를리 에브도의 사람들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 나는 그들이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했다. 내가 목소리를 별로 내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람들, 하이퍼 캐셔에 있던 사람들, 경찰들이었지, 나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지네브 [엘 라주이]와 뤼즈를 만났는데 정말 즐거웠다. 그들은 나를 안고 슬로건을 칭찬해 주었는데, 나는 짐을 한결 던 기분이었다! 나는 “잘 됐군, 그들이 이해하는구나.” 라고 혼잣말을 했다.

연대의 상징으로 ‘내가 샤를리다’를 바꾸어 쓴 예도 있다. 사우디 블로거 라이프 바다위를 지지할 때 쓴 ‘내가 라이프다’와 바르도 박물관 테러 이후 나온 ‘내가 튀니스다’가 있겠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는가?

보다 가벼운, 심지어 유머러스한 변종들도 서서히 나타났다. ‘내가, 내가, 내가 쥘리엥 레페르다’(주: 프랑스 방송인 겸 음악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아무데나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미안하지만, 배관공과 자물쇠 수리공들이 우편함에 ‘내가 유용하다’라는 전단지를 넣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순수한 의사 전달일 때는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샤를리다’의 특정 활용 사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는가?

국경 없는 기자회와 일을 많이 했는가?

‘내가 샤를리다’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 바꾼 것은?

직업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제의는 들어왔지만 다 거절했다. 당시 내게 접근했던 사람들은 의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내가 샤를리다’를 통해서만 보게 부추기고 싶지는 않다.

1월 테러 이후 1년이 지났다. ‘내가 샤를리다’에 남은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소중히 해야 한다. 1월 7일까지는 프랑스에서 그건 선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우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5년 1월 7일이든, 2016년 1월 7일이든 마찬가지고,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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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FR의 Un an après, Joachim Roncin, créateur de "Je suis Charlie", revient sur un phénomène que lui-même n'a "pas compri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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