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점령지에 살았던 시리아 의사의 선택

얼마 지나지 않아 IS 일원들이 치료를 받으려고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민족, 종교,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치료하자는 의료 윤리에 따라 행동했다. 어느 날 IS일원들이 오더니, 라카 시에서 그들이 점령한 병원에서 일하라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의사들 대부분이 시리아를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거부했고, 그 후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도무지 숨을 곳이 없었다. 라카 주변에 작은 마을도, 라카 시내도 안전하지 못했다. 시리아를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위험하게 남아 있느니 차라리 죽음의 배에 올라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2015-12-22     국경없는의사회

네덜란드에 도착 이후 마르완 박사 @Ikram Ngadi

2013년 4월과 5월에 교전, 공습, 무차별 총격이 갑자기 치솟았다. '자유 시리아군'(Free Syrian Army, FSA)이 라카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시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정부군의 공격을 받았다. 어느 날, 나는 동네 분과 함께 병원 밖에 서 있었는데, 바로 내 눈 앞에서 그분이 총에 맞았다. 바로 그때 병원 문을 닫아야겠다고 결정하였다.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1주일 후, 근처 사원에 통폭탄이 떨어졌고, 이 때문에 내가 운영하던 병원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다행히 그때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리아 남부 다라 주에 위치한 부르사 병원이 통폭탄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후@MSF

한편, 여러 반군 조직들이 돌아가면서 라카를 점령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자유 시리아군(FSA), 다음에는 알 누스라(Al Nusra), 그리고 2013년 말에는 IS가 나타나 라카 지역을 점령하려고 했다.

나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집에다 진료소를 열기로 결정했다. 의사로서 나의 좌우명은 '사람들을 치료하되, 너 자신을 보호하는 일도 힘쓰라'였기 때문이다.

국경없는의사회 의료팀이 시리아 이들리브 지역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Robin Meldrum/MSF

하지만 집 앞에 IS 일원들이 오가는 것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무서운 일이었다. 그들은 지프를 타고 굉음을 내면서 거칠게 운전을 했다. 몇 달 후,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이 IS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밤에 찾아와서는, 같이 가서 부상자들을 치료해 달라며 나를 몰아붙였다. 우리 가족들은 행여나 내가 돌아오지 못할까 봐 겁에 질렸다. 나는 늘 생각했다. 공습을 맞아 죽거나, 아니면 IS에게 공격을 받아 죽거나 할 거라고.

라카에서의 삶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낮에는 정부군의 공습이, 밤에는 연합군의 공습이 이어졌다. 제트기 소리가 너무 커서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가까운 친구도 정부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서서히 떠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선 터키로 간 다음,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고, 이후 여정을 계속해 네덜란드까지 갈 생각이었다. 당시 아내 뱃속에는 셋째 아이가 있었는데, 산달이 되어 몸이 많이 무거운 상태라 아내는 먼 거리를 이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친구와 함께 내가 먼저 떠나서 이민 서류를 모두 마련해 놓고 난 뒤에, 가족들이 따라 오기로 했다.

IS, 쿠르드 전투원들, 알 누스라 전선, 자유 시리아군 등 여러 무장 단체들 사이에 교전이 이어지는 통에 라카를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라카와 에프린(Efreen) 사이에 있는 검문소 3개를 지나야 했는데, 마치 서로 다른 세 국가를 지나는 기분이었다.

이즈미르에 가 보니 정말 혼잡했다. 길거리에서 자는 사람들, 굶고 있는 사람들 등등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밀수업자에게 가진 돈을 다 줬는데, 결국 그곳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침몰한 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친구와 바다를 한번 보러 나갔다. 우리도 저기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바다를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민들이 밤새 고무보트를 타고 그리스 섬 코스에 도착하고 있다@Alessandro Penso/MSF

베오그라드에 가서야 심카드를 구해 집에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아내와 딸 아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아들 녀석은 얘기하길 거부했다. 내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는 마음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아내는 10월에 셋째를 낳았다. 내가 떠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내가 새로 태어난 아들 사진을 내게 보내 주었다.

150여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마케도니아 국경을 건너고 있다@Alessandro Penso/MSF

마르완 박사의 시

품었던 꿈들이 힘없이 짓밟힌 지금,

새들도 날갯짓을 멈춘 듯.

나는 그저 난민.

담배 한 개비 피워 물 때면

* 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을 썼습니다.